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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8

여름전성기, 단축수업

by 던다

1990년의 여름은 나에게 일종의 ‘여름 전성기‘같은 해였다. 서울에서 충무로 이모네에 갔다가 다시 충무에서 이모의 시댁식구들이 많이 사는 거제도에 다 함께 갔다. 서울에 왔다가 충무와 대구에 사는 이모와 사촌들이 다시 우르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두세 밤 자고 다시 이모부와 우리 식구들은 아버지의 진정한 힐링 취미인 낚시를 하기 위해 안동댐에 갔다. 안동에 간 김에 다시 경북 군위에 들러 친가 조부모님 만나 뵙고 서울에 다시 왔다. 그런 해는 전무후무했다.


그 중간에 과학캠프에도 갔다. 장소는 기억이 안 난다. 방학 중에 여러 학교애들이 함께 가는 캠프에 간다는 것이 설렜었다. 2박 3일의 캠프 비용이 정확히 기억이 난다. 10만 원이었다. 빠듯한 살림에 10만 원이 웬 말이냐. 지금으로 치면 40-50만 원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그 해 여름은 분위기상 꼭 가야 할 것만 같았다. 그전에도 늘 여름이면 과학캠프 안내는 늘 나왔지만 비싼 가격으로 나에겐 집 잘 살고 집에서 신경 쓰는 애들이 가는 그런 행사였다. 당시 담임선생님이 이래저래 홍보겸 압박을 좀 하셨던 것 같고 그러면서 같은 반 애들도 몇 명 같이 가게 됐다.

숲길을 걸으면서 고사리 따서 포자 관찰하고 자기가 딴 고사리잎을 하나씩 코팅해서 나눠준 일, 야광스티커 같은 것으로 별자리 알아보고 밤에 나가서 별자리 본 일이 기억에 남는다. 딱히 아프지 않았고 힘들지 않았다.


5-6학년 때 나는 과학주임이자 담임선생님의 영향을 꽤 받았다. 담임선생님 담당인 발명품 경진대회에 나갔었고 심지어 입상도 했었다. (내용은 허접했다. 실내화주머니 아랫부분에 모래가 분리되는 작은 상자를 넣어 실내화에 모래가 마구 들어가는 걸 막는 실내화주머니였다.)


그리고 방학엔 과학탐구대회에도 준비했다. 요즘 같으면 사교육으로 진짜 그럴싸하게 했을 텐데 난 주변에 도움받을 곳도 마땅치 않고 나 자체도 과학적으로 감각이 있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저 성실한 스타일이어서 당시 유행하던 과학교양도서 ‘재미있는 별자리 여행’이라는 책을 정리하는 식으로 보고서 같은 것을 썼다. 원래는 찬물과 더운물로 콩나물에 물 줘서 어떤 온도에서 더 잘 자라 나를 보려고 했는데 한두 번 해보다가 물 온도를 맞추기 힘들어서였는지 뭐로 하든 콩나물은 개의치 않고 잘만 자라 서였는지 그냥 지나갔다. 탐구대회인데 초등학생이 아무 도구도 없이 천문에 대해 뭘 탐구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데 난 대회에 대한 전반적인 개념도 없어서 내 맘대로 4절 스케치북에 3색 매직펜으로 또박또박 내용을 정리해서 발표자료를 만들었다.


그런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반대표로 뽑혀 각반 대표들이 모인 교실에서 발표도 했다. 내 기억에 발표도 떨지 않고 곧잘 했는데 더 이상 뭘 탐구하기 힘든 주제라 당연히 떨어졌다. 그날 기억이 난다. 평소의 조용하고 소심한 내가 낯선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데 어쩐 일인지 크게 어렵지 않고 뿌듯한 마음까지 들었다. 아마도 내 앞 차례 중 한 친구가 발표 무섭다고 도망가서 그게 용기가 됐다. 선생님들이 그냥 귀엽다고 아하하 웃으셨다. 그때의 경험으로 내가 준비한 콘텐츠가 있다면 그걸 사람 앞에 말한다는 건 크게 어렵지 않고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캠프에 직전 우리 가족은 거제도에 있었다. 이모의 시댁친지들이 모여사는 동네였다. 어릴 때 엄마와 이모가 지나가는 말로 “영샤(이모는 엄마를 이렇게 불렀다. 러시아어 같지만 놀랍게도 경상도 사투리이다: 영숙이 언니-> 영숙이 희야-> 영싀야-> 영샤) 니는 사과 좋아해서 과수원에 시집갔고, 내는 생선 좋아해서 바닷가로 시집갔다 아이가. “ 엿은 저녁에 되어선 어른들은 잘 보이지 않았고 애들끼리 바닷가에 둘어앉았다. 이것도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놀라운데 그 애들이 모두 사촌의 사촌들이었다. 이모네 아이들, 나와 오빠, 그리고 거제도에 사는 사촌의 사촌들이 다 모여 앉으니 열댓 명이 되었다. 그때 이모부가 우리 뒤에서 캠프파이어하라고 나무랑 불 등을 준비해 주셨다. 처음 보는 또래들이었는데 우리는 알아서 둥그렇게 들어앉아 자기소개를 하고 게임을 하며 놀았다. 천하제일 조용한 우리 오빠도 그 분위기에 적당 끼여 어울렸다. 게임하다 걸리면 노래해라 하면 노래하고 엉덩이로 이름 써하면 그렇게 하고 둥글게 둥글게 놀았다. 그렇게 노는 데에는 돈이 들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놀다가 적당한 시간에 크게 아쉬워도 하지 않고 스르르 헤어졌다.

이 일기는 사실 별 내용도 없지만 교감선생님의 멘트가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언급하고 싶다. 2일 전 개학을 했고 에어컨이 없고 학생수가 많던 시절의 교실은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도 여전히 관리자와 교사들 사이에 단축수업을 두고 실랑이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다 급히 이튿날부터라고 단축을 하는 것으로 결정을 하고 교감선생님이 방송을 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아동’와 ‘도시락’이라는 단어가 새삼스럽다. 맞벌이집에선 일찍 온 애들은 어땠을까 싶기도 한데 그땐 또 적당히 알아서 찬 밥 꺼내먹고 적당히 애들이랑 동네에서 놀지 않았을까 싶다.


오학년의 던다야.
5학년은 너에게 중요한 해였구나. 조용하지만 적당히 어울리기도 하고, 학교에서 하는 거라면 성심껏 해보려고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어디서 얻은 자신감인지 넌 5학년 때부터 곧잘 발표도 했다. 기억해보니 그렇네.
아마도 글짓기상을 받으면서 애들에게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다는 생각이 힘이 되어 그랬나봐.

넌 아주 즐겁고 짜릿하진 않아도 안정적인 생활 여건 속에서 자라고 있구나. 엄하고 무섭고 제약이 많은 가정이었지만 그로 인해 절제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랐어. 또. 엄마가 정성들여 매일 한두줄 적어주셨잖아. 자식이 그러하듯 부모도 사람이야. 실수도 하고 헛점도 많아. 그 시절을 버텨오고 너를 길러낸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자. 감사할 일은 감사한 거고 나머지는 너그러이 훌훌 흘려버리자.

육학년의 던다를 기대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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