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엄마, 피정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었다.
그때까지도 학원을 전혀 다니지 않고 집안일하고 방에서 혼자 놀다가 토요일에 성당 가는 재미로 살았다.
내 학창 시절의 사진, 그러니까 국민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때를 보면 모두 치아에 교정기를 하고 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초등학교 3학년부터 시작된 교정은 고1이 돼서야 끝이 났다. 도대체 왜 그렇게 오래 했는지는 모르겠다. 얼핏 내가 유치를 가는데 너무 오래 걸려서 그랬다는 정도만 기억하고 있다.
이 일기에 등장하는 중요인물은 바로 작은어머니이다. 이 분은 내 성장기에 걸쳐 쭉 내가 굉장히 미워한 분이다. 하..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큰 이유는 집단보다 자신의 가족, 가족보단 개인을 중요하게 여겨서 그랬다. 마치 지금 기성세대가 MZ를 보면서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반면, 내 아버지와 엄마는 거의 개인은 없다 싶을 정도로 집단, 대가족 중심의 마인드를 지닌 분이셨다. 명절에는 교통정체로 10시간이 넘겨 걸려도 시댁에 갔고, 농한기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셨고, 시누이 결혼이나 시가의 대소사에는 엄마는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 시누이 셋과 함께 살기까지 했다. 아버지가 가족 모임에 간다 하시면 반대의견은 원천 차단된 채 무조건 따라야 했다. 중간고시라 못 가요 뭐 이런 의견은 애당초 싹을 틔울 수 조차 없었다. 이런 순도 높은 가부장제 플러스 금욕주의 속에 살았고 엄마는 그 안에서 주님에 매달려 삶의 팍팍함에 숨구멍을 찾으려 하셨다. 그런 우리 집이었는데!
반면, 작은 엄마는 예쁜 거 꾸미는 거 좋아하고, 새로운 물건 좋아하고, 희생보다는 자기 안위와 만족을 추구하는 스타일이었다. 더군다나 작은 아버지는 아버지 집안애 돌연변이처럼 아내와 딸들에게 다정하셨다. 두 딸과 아내 사이에 군림하지 않고 대등하게 사는 가정의 일원이었다.
그러니 각종 시댁일에 며느리가 대동되어야 할 때 작은 엄마는 이런저런 핑계로 빠졌고, 그로 인해 나의 엄마는 그 부족분을 더 채워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러니 딸로서는 작은 엄마가 도무지 도무지 좋아 보였을 리가 없었다. 이기적인 속물로 보였다. 사춘기 한창때는 그
분노가 이글거려 종이에 작은 엄마에 대한 흉을 한바닥 쓴 뒤에 찢어버리는 의식을 치르며 내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그런 존재가 외모에 관심이 많으니 자연히 내 머릿속 연결고리에는 엄마를 힘들게한 나쁜 사람=유행에 민감한 사람, 외모에 관심 많은 사람으로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일기는 작은엄마가 평소에는 나와 엄마를 꾸밀 줄 모르고 돈 쓸 줄 모르는 촌스러운 모녀 정도로 생각하다가 어쩐 일로 나의 외모의 어떤 부분, 그러니까 입매를 칭찬해서 깜짝 놀라는 부분이다.
그렇게 미웠던 작은 엄마도 더 시간이 흘러 자녀를 시집보내고 할머니가 된 모습으로 보니 또 다른 모습이 보였다. 나의 엄마는 결혼 생활의 상당 부분을 시월드와 강한 남편으로 인해 강요된 헌신으로 살았다. 그러다 갱년기와 함께 ‘이제 좀 내 맘대로 살자 ‘의 내면의 목소리가 와락 커져 진짜 60대 중반부터는 누구도 말릴 수 없이 신나게 사셨다. 그즈음 나는 결혼해서 여느 친정엄마의 모습을 기대했으나 희생총량의 법칙에 의해 나에게 남겨진 희생은 남아있지 않았다. 되려 내가 엄마를 정서적으로 도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반면 작은 엄마는 줄곧 잔잔하게 원하는 대로 풀며 살아 그러신 지 두 딸 손주들도 잘 돌봐주고 딸들 챙기면서도 그것을 힘들어하지 않고 다복하게 사셨다. 어린 날 이기적이라 욕했던 작은 엄마가 친정엄마, 외할머니의 모습으로는 좋아 보였다. 그렇다고 나의 엄마를 비난할 수도, 나의 아버지 친지들을 비난할 수도 없다. 그들은 그 시대에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바를 충실히
지키며 산 사람들이다. 그저 엄마는 그 대가족 피라미그에 최하위에 있었을 뿐이고 난 그 아래 안타까운 마름으로 바라봤을 뿐이다.
직접적인 남녀차별를 받은 적이 없는 데도 뼛속깊이 (일명) 페미의 정서가 흐르는 데에는 나의 성장기에 보고 접했던 문화의 영향일 것이다.
성당에 증고등부 주일학교에서는 여름이면 캠프, 겨울이면 피정을 갔다. 피정이라 함은 수녀회 같은 곳에 가서 2박 3일 정도 숙박을 하며 조용히 기도하고 묵상하며 지내는 것이다. 많은 경우 일정 시간 침묵하며 보내기도 한다. 일기를 보니 시계도 반납한 모양이다.
쉽게 말해 템플스테이의 성당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스마트폰 중독 현대인에게 디지털디톡스와 결부해서 상품화해도 좋을 것 같다. 핸드폰, 시계 다 내고 침묵수행하며 2박 3일 멍 때리며 지내는 프로그램이라. 일상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솔깃하지 않을까.
친할아버지는 4형제셨는데 형님할아버지가 서울 뚝섬 근처에 사셔서 명절이며 한 번씩 방문했다. 친지들이 다들 찐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데 유독 큰할머니만 서울말을 쓰신 점, 딱히 이쁠 것도 없는 나를 이쁘다고 해주신 것이 기억에 남는다. 할머니댁은 한옥이었는데 안방 위에 자녀들 결혼사진이니 아기들 돌사진이니 그런 사진들이 빼곡히 걸려있었다. 가서 하는 일이라고는 뻘쭘하고 머쓱하게 다리를 바꿔가며 앉아 있다가 올해 몇 학년이냐, 공부 잘하냐, 누구 닮았냐, 많이 컸네 등의 얘기를 듣고 오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이 날은 성별과 서열 상 그 큰할머니댁에 가지 못해 세뱃돈을 받을
기회를 놓쳐 아쉬워하고 있다.
93년을 맞은 던다야
순하고 얌전하게 자라다가
내가 사는 이 가정은, 성당의 사람들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다고 느끼기 시작하던 때였지.
그러면서 친구에게 성당 사람들에게 내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했고
조용하게 비치는 내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였어. 왜 누구는 가만히 있어도 인기가 많고 이쁨을 받고 난 그러지 못할까.라는 생각을 한창 하던 때.
결국 넌 너에 대해 쉬지 않고 고민하다
40이 넘어서야 조금 깨달음이 오고 긍정하게 될 거야. 지나가는 과정이니 조급해할 필요 없어.
쉽게 얻는 인기는 쉽게 가버리는 거라는 걸 천천히 알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