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나는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살아가고 있을까?
중2 때 도덕선생님은 신규 남자 선생님이셨다. 다양한 시도를 하셨는데 그중 하나가 매주 글쓰기 숙제를 내주신 것이다. 지금은 중학교에서 숙제를 안 해온들 딱히 불이익을 줄 수도 없고, 하다못해 야단치는 것도 애매한데 그때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어렴풋이 선생님이 수업 시작하며 숙제 펴봐라. 누구 일어나서 읽어봐라. 하면 애들이 조용히 듣고 선생님이 한 마디 코멘트를 해 주시고 반장이 걷어서 사인받고 돌려받는 식이었다. 난 주변의 상황에 둔감한 편이라 다른 친구들은 어느 정도 그 숙제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매번 칸을 꽉꽉 채워 성실히 했다. 누구의 칭찬과 상과 같은 외적 보상 없이도 내가 즐겨하는 일이었다.
지금에 있어서는 일기 공백 시기에 이렇게라도 당시의 나의 생각을 볼 수 있게 그 숙제를 내주신 점, 굳이 안 해도 되는 귀찮은 일을 자처해 주신 점에 대해서 선생님께 감사하다.
2025년, 2020년보다도 5년이나 더 지난 시점에 살고 있다.
당시의 내가 기자를 꿈꿨다는 것이 무척 낯설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스스로 겉으론 얌전해 보이지만 글 쓰는 걸 좋아하고 속에서 꿈틀대는 적극적인 면이 있어서 그 일을 꿈꾼다고 했다.
30년 전 나는 40대의 나를 떠올리며 직업을 사랑하고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으로 살아갈 거라고 한다. 결혼유무는 확실하지 않지만 했다면 현모양처이면서 직장에서 일도 잘하고 살 거라고 한다.
도덕시간에 선생님은 곧잘 나를 지목해서 읽어보게 했는데 이 내용을 읽었던 것 같다. ‘현모양처‘라는 단어 사용을 듣고 거칠게 표현하면 ’ 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얘기한 거냐’였고 실제로는 ‘현모양처의 의미를 더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라고 말씀하셨다. 현재의 나는 열정을 쏟으며 일하는 사람은 맞지만 과거의 현모양처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가족 간에도 적당힌 거리가 반드시 필요하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결같은 정서적 지지라고 믿는 사람이 되었다.
이 주의 주제는 ‘자신에게 쓰는 편지’였다. ‘공부를 잘해야 한다, 열심히 하자’라는 다짐이 대부분이었다. 글 말미에 자기 전 이불속에서 그날을 떠올리며 머리를 마구 흔드는 어린 내가 떠오른다. (아 이건 아니야! 왜 이게 안될까!) 생각해 보면 지금도 비슷한 습관이 있다. 머리를 흔들다가 ‘잊어버리자! 고민은 털어내고 일단 자고 내일 생각하자.‘하고 잠을 청한다.
매일 보는 어른이 선생님이니 선생님에 대한 불만과 관심이 정말 많았던 때이다. 지금처럼 학원을 많이 다니지 않을 때였고 더욱이 나는 중2 때도 영어학원, 수학학원 같은 공부하는 학원을 다니지 않았다.
여느 아이들처럼 나도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선생님을 싫어했다. 그것 말고는 성의 없게 가르치거나, 자기의 직업, 과목에 자조적인 유형, 뭐든 애매하게 말해서 시험 준비하는데 혼란을 주는 유형을 특히 싫어했다.
글에 나와 있는 일으켜 질문도 많이 하고 쪽지 시험도 많이 보는 선생님은 가정 선생님이셨다. 당시 사립 여중의 가정 선생님들은 연세가 다 있으셨는데 그분들이 진로를 결정할 시기에는 가정대가 가장 알아주던 때였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고 우리에게 가정 과목에 대한 기대도 상당히 높았다. 그래서 매 시간 배운 교과서 내용을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한 명씩 일으켜 세워 질문을 하셨는데 제대로 대답을 못하면 덜덜 떨면서 부끄럽고 무서운 순간을 감내해야 했다. 선생님은 매서운 눈으로 장부에 뭔가를 기록하셨는데 사실 돌이켜보면 별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때때로 입원하시기를 바란 선생님이 바로 그 가정 선생님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기혼 여자 선생님의 학교에 쏟는 애정에 관한 문제이다. 젊음 그 자체만으로도 젊은 선생님을 좋아하게 마련이지만, 나는 그 이유를 학생에 대한 존중하는 방식과 일에 쏟는 애정을 들었다. 당시 담임선생님이 아니고서는 선생님이 학생의 이름을 아는 경우가 많지 않아 되는대로 ‘누구야, 친구야, 거기 안경 쓴 친구’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나라는 특별한 존재이기보다 군중 속 한 명의 학생이었다. 그런데 젊은 샘들은 존댓말도 써 주시고 해서 그게 좋았던 모양이다. 우기면 우리 의견도 들어줄 것 같은 틈이 보였다. 그런 데다가 당시 도덕선생님처럼 이런저런 것들을 수업에 시도하는 것도 좋았다. 다소 투박하고 불편해서 원래 것만도 못한 부분이 있을지라도 그런 시도 자체가 젊게 느껴졌다.
막상 기혼 유자녀 교사가 되고 보니, 특히나 자녀가 어릴 때는 매일의 생존 자체가 힘겨운 전투였다. 그런 면에서는 달리 할 말이 없다. 한 편으로는 다들 그 시기 그렇게 거쳐왔다고, 그러면서 진짜 어른이 되는 거라고 해야 할지, 어린 자녀를 양육하며 일하는 것이 얼과 혼과 넋이 모두 나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결국에는 당시 어린 눈에 봤을 때 체념한 듯 매너리즘에 빠진 듯한 아줌마샘들은 알고 보면 내리막인 체력과 살림과 육아, 기타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들 사이에서 나름의 최적점을 찾은 모습 아니었을까 싶다.
중2부터는 공책에 일기를 쓰는 대신, 수첩에 깨알같이 짧게 생각을 적어놨었다. 오늘 알게 된 사실, 그 있을 줄 알았던 수첩(다이어리)들이 자취를 감춰서 살짝 충격인 상태이다. 공연 티켓이나 극장 티켓도 붙여 두었던 수첩들이 집안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데 없어진 것 같아 살짝 울적한 상태이디. 그나마 고2 때인 것으로 추정되는 실한 수첩하나는 확실히 있어서 다행이다.
(이 노트가 있게 해준 도덕샘 이야기)
https://brunch.co.kr/@danas/14
본격적인 중학생 2학년의 던다야
93년은
평생을 절친을 만난 해이고,
성장이 멈춘 해이고,
전 학창 시절에 있어서 유일하게 저경력, 열정 많은 선생님을 만난 해였다.
요즘 아이들처럼 열심히 수학문제 풀고 학원숙제하며 여가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꼭 꼭 복습하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공부하기 전엔 친구에게 편지나 쪽지를 꼭 한 편씩 쓰고 여차하면 책상 정리를 대대적으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면이 있기도 했지.
글로 마음도 생각도 정리하며 사는 모습은
오랫동안 너를 이루는 중요한 면이 될 거야.
오늘도 응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