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중딩의 다꾸, 고대 농구선수들 만남
1994년 중학교 3학년이었다. 어느 학교에서의 마지막 학년이 그렇듯 학교생활에 여유가 있었다. 여자 중학생으로서의 감성과 장난기가 넘치던 때였다. 지금 봐서는 민망하고 오글거리는 메모가 많다. 엄밀히 말해 많은 정도가 아니라 전부다.
내 기억이 맞다면 오성식의 굿모닝 팝스 월간지에서 오려 붙인 영화 스틸컷이 아닐까 싶다. 그때는 둘의 아련한 사랑얘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시애틀이 어디 붙어 있는지 왜 완벽한 남친을 두고 갈등하는지. 어렵사리 둘이 만나서 겉도는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를 때였다.
94년 1월 1일. 같은 동네에 살았던 7살 많은 사촌 정민이 언니네 집에 놀러 갔다. 대구에서 온 1살 위의 또 다른 사촌 지민이 언니도 와 있었다. 정민이 언니는 이모들 딸 중에 맏이라 여러 사촌동생들 사이에 대장 노릇을 많이 했다. 성격도 대장부 같은 면이 있기도 해서 나를 비롯해서 사촌들이 다 잘 따랐다. 이날은 언니가 일종의 어른 체험을 해주기로 했는지 개다리소반에다가 과자와 소주, 소주잔을 가져왔다.
“너희는 어른들이 술을 왜 마시는 거 같아?”
물어보고 대답을 한 명씩 들어보고는 “자 한 잔씩 마셔봐.”했다. 지민이 언니와 나는 한 모금 마시고 오만상을 썼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새해 첫날의 밤을 보냈다. 언니는 k-장녀(특기: 부모님한테 큰소리로 잔소리하면서 다 챙겨드리기)에 적당히 까졌었고 자신만만하고 당돌하고 쿨한 면이 있어 남녀 모두에게 인기 있는 스타일이었다. (이 언니는 훗날 20대 후반에 미국으로 건너가 군대에 입대한다.)
스포츠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이 시절에는 국가적 체육대회는 그야말로 전 국민의 화제였다. 내 수첩에도 94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을 적어두었다. 채지훈 선수와 이이경 선수의 메달 소식이 떠오른다.
살던 곳 가까이에 상*고등학교라는 사립 남자 고등학교가 있었다. 친구들의 오빠들이 많이 다닌 학교였다. 그냥 전해 듣기로 공부 잘하고 애들 사이에 신망이 있어서 학급 반장이 되면 그 엄마는 그 반 엄마들에게 돈을 얼마씩을 모아 담임선생님에게 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얘기가 공공연한 비밀이었는데 어느 날 그 학교가 사학비리로 크게 언론에 나오게 됐다. 그러면서 그 학교 이사장인지 교장 이름까지도 알게 되었다. 깊이는 몰라도 ‘어떻게 그런 일이!’ 분개하던 때가 떠오른다.
덧붙여 두발규제가 상당했던 학교였다. 배드민턴채를 올려놓았을 때 위로 삐져나오면 안 된다고 들었다. 친구 오빠가 머리가 빨리 기르는 편이라 시험기간에 머리를 못 잘랐는데 교문 앞에서 단속하던 선생님왈 “너 헤비메탈하냐?!”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래봤다 고작 3-4cm였을 것이다.
4월 12일. 도덕 시간에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 인터뷰하기‘숙제가 있었다. 94년 1-2월에 방영했던 농구드라마 ‘마지막승부’로 농구에 대한 인기가 치솟을 때였다. 난 별 생각이 없었는데 같은 반 친구 연호라는 아이가 농구팬이어서 농구선수를 만나서 인터뷰를 하자고 제안했다. 연호는 나보다 훨씬 길눈도 밝고 모험심이 있어서였는지 고려대 농구팀을 만나러 고려대에 가자고 했다. 한치의 망설임과 두려움 없이. 왜 고려대냐 했더니. 최근에 연대에 졌다나? 그럼에도 꺾이지 않고 잘하고 있다고 그랬나? 이유야 어찌 됐던 연호에게는 선수를 꼭 두 눈으로 보고 말겠다는 단단한 의지가 있었다. 난 얼떨결에 연호와 함께하게 됐다. 딱히 학원을 열심히 다니던 때도 아니라 어찌어찌 엄마에게 얘기하고, 당시 고대 근처엔 지하철도 없어서 먼 먼 길 버스로만 타고 갔다. 가로로 긴 봉이 있었던 맨 뒤 좌석에 앉았고 졸며 깨며 갔다. 살던 동네와는 풍경이나 느낌이 사뭇 다른 동네를 지나고 지나 드디어 안암동에 당도했다. (지금 지도앱에서 찾아봐도 두 번 갈아타야 하고 1시 24분 걸리는 거리다.)
캠퍼스에 도착하고도 학생들에게 물어물어 선수들이 연습하는 체육관에 도착했다. 장신의 선수들은 왜인지 족구를 하고 있었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옆에 같이 구경하는 같은 학교 의예과 학생과 얘기하기도 하고, 벤치에서 대기하는 농구선수랑 얘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아주 잠깐 선수들 쉴 때 용기 내어 코트에 내려가서 “무슨무슨 숙제하러 왔는데요. 질문에 답해주실 수 있나요?” 물어봤고 대답은 좀 성의 없었던 기억이 있다. TV에서 보던 현주엽, 양희승 선수를 보니 좀 신기했는데 그보다 엄청나게 큰 키가 더 신기했다.
그리고 어쩐지 놀라운 경험을 한 것 같아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먼먼 길을 연호 덕에 헤매지 않고 잘 돌아왔다. 누군가를 엄청 좋아하면 이런 용기도 낼 수 있구나 싶은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