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선생님에 대한 불만, 불쾌하고 평범한 경험, 외할머니
지난번에 이어
• 1996년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 문과반이었고 2학년 1반이었다.
• 세살 터울의 오빠가 공군에 입대했다.
• 대구에 사시는 외할머니는 곧잘 우리 집에 오셔서 며칠간 머무르다 가셨다. 그럴 때면 나랑 같이 방을 썼다.
1996. 9. 6. 나른한 담임선생님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키가 크고 인물이 좋으셨고 나른한 아우라를 풍기는 분이었다. 걸음도 눈빛도 표정도 태어난 김에 어쩔 수 없이 사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선생님에게 큰 불만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청소지도를 대충 하는 거였다. 나는 유독 교실청소를 열심히 했고 다른 감시의 눈 없이도 나처럼 성실히 하는 친구의 도덕성을 높이 샀다. 현실이 그렇듯 그런 학생들은 많지 않았고 주로는 창가 창틀이 기대어 노닥거렸다. 왜 선생님은 임장해서 철저히 지도를 하지 않아서 나 같은 애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는 쪽지인가 편지인가를 써서 그런 나의 불만을 소상히 표현했다. 선생님이 편지를 읽은 그날 청소지도를 하셨다. 아쉽게도 선생님은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이튿날부터는 원래대로 돌아갔다. 허허.
1996. 9.1. 불쾌한 기억들
나는 여학교를 10년 다녔다. 그 10년간 크고 작은 성에 관한 불쾌한 경험을 했다. (그 이후도 있었지만 어릴 때에 비하면 충격이 덜했다.) 중학교 때 버스에서 내 몸을 만졌던 치한, 학교 창문 너머로 보였던 바바리맨, 대학교 때 인적 드문 길을 걷다가 당한 추행. 지금으로는 난리 날 부적절한 희롱성 발언을 학교와 학원에서 듣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핸드폰이 보급되기 전 시절이라 전화를 받으면 신음소리를 내다가 음담패설을 하고 끊어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런 경험이 나름의 득이 된 부분이라면 언제라도 성범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30대 중반 이후부터는 성범죄 피해자가 될 확률이 확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오랜 습관 때문인지 여전히 골목길에서나 지하철 플랫폼에서나 잠재적 위험을 염두해두고 주변을 살핀다. 내가 특별히 운이 나빴거나 피해의식이 큰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1996.9.23 (월) 아카펠라 공연
학교에서 예술의 전당에 음악회 단체 관람을 갔다. 학교에서 영화는 가끔씩 보러 간다고는 해도 음악회를 보러 가는 일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에 영국 아카펠라 그룹인 ‘킹즈싱어즈‘가 내한했었다. (우리의 단체 관람은 저녁에 있을 공연의 리허설쯤이었던 것 같다.) 그 그룹은 ‘더클래식’의 마법의 성을 불러 화제가 됐었다. 처음 들어보는 아카펠라는 신선했다. 내가 앉은자리는 음악당 2층 중앙이었다. 재잘거리기 좋아하는 나이였지만 고요한 가운데 들어야 하는 공연을 제법 괜찮은 관람매너를 지키며 감상했었다. 곡 리스트는 수도원에서나 들을 수 있을법한 미사곡부터 우리들 귀에 조금 익숙한 올드팝, 마법의 성까지 지루하지 않게 구성되었다. 음악회에서는 무덤덤하다가 감동이 서서히 밀려왔다. 집에 가서 다시 듣고 싶은 마음에 콘서트 티켓값을 알아보고,앨범도 샀다. 그 이후 대학생이 되어서 혼자 킹즈싱어즈 콘서트를 가고, 끝나고 멤버들에게 사인도 받고 몇 마디 대화도 나누고, 사진도 찍었다.
1996. 10. 15. 외할머니
이맘때 나는 외할머니와 한동안 방을 같이 썼다. 70대 후반이었지만 엄청나게 몸이 날쌔고 활동적이셨던 할머니는 매일 미사는 물론 배낭 가득 빈 물통을 지고 집 앞 산에 혼자 가셔서 약수물을 떠 오시기도 했다.
지인도 별로 없는 낯선 동네에서 어떻게 알고 가셨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일명) ‘떴다방‘같은 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큰 그릇이나 프라이팬을 사 오기도 하셨다.
할머니는 안경, 묵주, 기도책 등 할머니의 소지품을 하루에도 숱하게 찾으셨다. “내 안경이 어디갔노?” “내 묵주 금방 여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며 나이가 들어서는 물건 찾는데 엄청난 시간을 보내는구나 생각했다. 지금은 차라리 핸드폰 하나만 챙기면 되니까 다행인걸까.
옆 동네 다니듯 대구와 서울을 오가다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체력이 크게 꺾이게 되셨다.
이후에도 잔잔히 활동적으로 생활하셨다. 할머니는 어려서 부잣집 출신이라 그런지 체격과 체력이 좋고, 피부도 참 좋으셨다. (나로서는 성격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외할머니가 집안일을 챙기지 않고 밖으로 너무 돌아다니시고 가끔씩 술을 드신다고 좋아하지 않으셨다.)
여하튼 외할머니가 잔소리를 하지 않으시고 좀 틈이 있는 스타일이어서 나로서는 마음이 편한 분이었다. 괜히 할머니한테 “할머니 저 공부하니까 말 시키지 마세요.” “할머니 오늘부터 저 루비나(세례명)라도 하지 말고 진옥이라고 하세요. “ 등등 오히려 내가 할머니에게 이래라저래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자신의 비상금인 듯한 돈, 3~4만 원가량과 나에게는 별 필요도 없고 할머니에게 소중할 것 같은 한복 브로치를 나에게 주셨다.
주시면서 “너는 참 착한 애다.”라고 얘기하셨다. 그 순간, 이 순간이 나중에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란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그 이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귀도 멀고 눈도 멀고 반송장처럼 누워 계시다가 길게 길게 그런 생활을 하시다가 88세 나이로 돌아가셨다.
초식동물같이 온순히 살면서도 가정과 사회와 학교에서 부정을 보면 마음속이 부글거렸던 던다야
‘내가 선생님이라면, 내가 엄마라면 절대 저렇게 하지 않을 거야’ ‘나는 절대 못난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그런 마음을 품었을 너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비교적 안전하고 안정적인 공동체 속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프고, 불쾌하고, 아린 경험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일부 같기도 하다. 물론 앞선 세대의 어른들이 보다 믿을만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말이야.
수첩 한 구석 뉴스도 아주 작게 적어놓은 것도 어쩐지 귀여운 면모야. 가정과 학교라는 울타리 넘어서의 소식에 귀 기울이는 면도 있었구나.
너는 불만이던 담임선생님의 행동을 정의로 보답을 하기라도 하듯 교사가 되어 청소지도를 너무 충실히 하는 나머지 몇몇 아이는 불만을 품기도 할 거다. 허허. 뭐든 중용이 중요한데 말이야.
흔들리지만 중심을 지키며 너의 삶을 꾸려가는 너의 모습을 언제나 응원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