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
체중계 위의 현실과 마주했던 건 신우신염으로 일주일을 병원에서 지낸 뒤였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살을 안 빼니까 아픈 거라는 올케언니와 사돈의 말을 계속 곱씹으며 지냈다.
올케언니가 길을 지나가면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볼 정도로 날씬하다.
하지만 올케언니도 참 자주 아픈 사람이었다.
정말 웃긴 건 그녀 또한 신우신염으로 쓰러져 병원신세를 진 적이 있다는 거다.
감기도 나보다 훨씬 더 자주 걸렸고 툭하면 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아댔다.
내가 살이 쪄서 아픈 거라면 날씬한 올케언니는 대체 왜 아픈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결국 그 생각들의 종착역은 '원망'과 '증오'였다.
그 대상이 꼭 올케언니는 아니었다.
나의 비만을 소재로 자리의 분위기를 띄우려 했던 사람들, 나에게 내 살에 대한 이야기를 툭툭 던져대는 길 가던 이름 모를 행인들, 나를 겪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저 내 비만을 가지고 뒤에서 욕하던 사람들, 더 나아가서는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내 겉모습 하나로 판단 내리는 사람들. 그들 모두를 향한 원망과 증오였다.
그래서 결국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과 함께 퇴원하면 바로 체중계에 오르리라 다짐했던 것이었다.
내가 남의 재물을 도둑질해서 살이 찐 것도 아니고, 비만이라는 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나라는 생각을 하며 난 죄인이 아니니까 앞으로 뻔뻔하게 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비만으로 지내는 긴 시간 동안 다쳤던 내 자존감과 마음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처럼 바로 뭔가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단지 결심만 굳건했을 뿐이었다.
물론 당시에 날 둘러싸고 있던 환경들도 그러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하는데도 그렇게 힘이 들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이 모든 것이 핑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몸도, 마음도 온전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그러한 현실들을 타파할 힘이 부족했다고 본다.
그래도 난 현실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계속 이렇게 무례한 말들을 듣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생각 끝에 결국 당장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최대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의 식사를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사실 뻔뻔하게 살기로 마음먹고 제일 먼저 실천했던 것은 운동이었다.
당장 어떤 운동을 해야 할지 몰랐던 난 무작정 걸었다.
그런데 발바닥과 다리에 이상신호가 온 것이다.
걷기 시작한 지 3일 만에 아침에 일어나 바닥을 내딛기가 힘들 정도로 발바닥 전체가 아팠다.
뒤뚱뒤뚱 걸어야 할 정도로 발과 다리에 이상신호가 왔기 때문에 더 이상 걷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다.
내 어마어마한 체중을 감당해야 했을 발과 다리에 엄청난 무리가 간 것이 확실했다.
그래서 운동을 하려면 어느 정도 체중을 감량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말로 하거나 글로 쓰기에는 식단조절이 운동 보다야 훨씬 쉽게 느껴진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을 먹는 것 말이다.
운동을 하자니 당장 체력과 내 체중이 문제가 되니 그럼 먹는 걸 좀 규칙적으로 바꿔보자는 '간단한' 생각이었는데 세상에...
그 결심을 하고서 실천하기 시작한 첫 일주일이 내 생애 제일 힘든 나나들이었다.
하루 세 끼의 음식을 먹는 건 평범한 것이다. 게다가 소식도 하지 않았다. 꼭 한 끼에 밥 한 공기 썩은 먹었다. 그런데도 중간중간 허기가 지고 자꾸 뭔가 입으로 가져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분명 배가 고픈 건 아닌데, 그렇다고 막 부른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자꾸 과자가 먹고 싶고, 생라면을 까서 먹고 싶고, 치킨을 먹고 싶더라.
그동안 난 하루 세끼의 식사를 제외하고 많은 음식을 습관처럼,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입이 심심하다는 핑계로 섭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무서운 사실은 그렇게 쉴 새 없이 뭔가를 먹고 있었으면서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극단적인 절식을 한 것도 아니고 단식을 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하루 세끼의 식사만을 섭취하는 그 첫 일주일이 나에게 가장 큰 고비였고 내 생애 가장 힘들었던 날들 중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힘주어 말할 수 있다.
특히 밤에 자려고 누우면 배가 고파 잠이 오지 않았다. 저녁 6시면 저녁식사를 끝냈기 때문에 밤 9시 즈음이 되면 어김없이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밤 12시에 남편에게 라면을 끓여주면서 단 한 젓가락도 같이 먹지 않은 나를 크게 칭찬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버틴 것이다.
심야의 배고픔을 참아낸 다음 날 아침이면 나 자신이 그렇게 대견스러울 수 없었다.
어젯밤 라면을 참아낸 내가, 어젯밤 치킨을 참아낸 내가 너무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웠다.
물론 모든 날을 철저하게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먹고 싶은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그때도 나만의 규칙에 따랐다.
치킨, 보쌈, 족발, 떡볶이 등 자극적인 음식이 너무 먹고 싶을 때는 저녁에 일단 주문을 해놓고 다음 날 아침식사로 먹었다. 모든 음식을 하루 세끼 식사시간 외에는 절대 섭취하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밤새 배고픔을 꾹 참고 잠들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어제보다 더 가벼워진 느낌들이 하루하루 쌓여갈수록 내 자존감도 점점 회복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도 뭔가 해낼 수 있구나, 나도 이 정도는 참아낼 수 있구나라는 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감정들이 나를 천천히 변화시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