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전 호구입니다.

지랄 총량의 법칙의 피해자는 언제나 호구들이다.

by Jay

지랄 총량의 법칙의 피해자는 언제나 호구들이다.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평생 쓰고 죽어야 하는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 더 많은 지랄을 떤 사람일수록 점잖은 노후를 보낼 가능성이 크지만, 오히려 얌전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늦바람에 들 가능성이 높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 문장은 한 사람의 인생을 놓고 얘기한 것이지만, 곱씹을수록 조직 생활의 생리 또한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조직 안에서 사람들이 떠는 지랄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어떤 조직을 가도 반드시 그 안에 사이코 같은 사람 한두 명은 있다. 또한, 사이코 같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일을 하다 보면 자신의 일을 덜기 위해 지랄 맞은 행동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목격하게 된다(이기심은 인간의 본성인지라, 그런 모습을 특별히 못되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게 조직에서 만들어진 지랄의 총량은 [구성원들 각자의 이기심 x n명]으로 정해진다. 이 수치는 조직의 구성원이 바뀌더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조직의 문화가 그만큼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한번 정해진 지랄의 총량은 계속 대물림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조직에 적용한 '지랄 총량의 법칙'의 의미다(그냥, 나 혼자 그렇게 정의 내려 봤다).




하나의 조직에 부여된 지랄 맞은 일들은 그 안의 누군가가 반드시 감당해야 하며, 그 '누가'가 누가 될 것인지는 언제나 예민한 이슈다. 서로가 서로의 선을 지켜주며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에 가깝다. 사무실은 다른 사람의 지랄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는 전쟁터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러한 싸움은 누군가가 독박을 쓰고 피를 보는 쪽으로 결말을 맺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통은 조직 안에서 가장 착하고 마음도 여린 사람들이 피해자가 된다. 사람들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본성이 부딪히는 전투 속에서 언제나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되는 덜 이기적이고, 덜 못되고, 덜 독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사회에서는 흔히 '호구'라고 부른다.




잘 거절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입사 초반부터 어수룩해 보이기 그지없던 나는 많은 사람들의 먹잇감이었다. 성격이 드세거나 약아 보이지도 않았고, 적당히 순한데 일은 열심히 하려고 하니 딱 보기에도 자기 일 떠넘기기 좋은 호구로 생각됐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내 어수룩한 점을 나쁘게 이용했다. 늑대의 미소를 머금고 은근히 나를 치켜세워주며 계속 귀찮은 잡업들을 떠넘기려 했다.


'영재 씨는 아이디어도 좋고, 손도 빠르고, 일을 참 잘하네! 그래서 말인데, 이 일도 좀 봐줄 수 있을까?'


처음에야 일 잘한다고 자꾸 띄워주니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일을 가리지 않고 주는 족족 다 받았다(가릴 처지가 아니기도 했고). 그런데, 일을 줄 때는 그렇게 살갑게 대하던 사람들이, 내가 그 일들 때문에 힘들어할 때에는 날 외면했다. 일이 자기 손에서 떠났으니 더 이상 본인 책임 아니라며 쓱 발 빼버리던 못된 사람들. 그들은 이기심 많은 보통의 사람들(또는 사이코)이었고, 나는 호구였다. 언제나 피를 흘리는 건 나였다.




초반에야 업무적으로 여유가 좀 있던 터라 사람들의 지랄 맞은 이기심을 그래도 어느 정도는 수용해줄 수 있었다. 그런데, 팀의 인력이 줄어서 나에게 오는 업무량이 급격하게 늘어나던 시점부터는 얘기가 달라졌다. 그때부터는 나에게 튕겨져 오던 업무 짬들이 감당이 안되기 시작했다.


내가 처리해야 하는 업무들의 마감 기한이 늘어지기도 했고, 내 일에만 집중하고 몰입할 수 없으니 스스로가 만들어낸 업무의 아웃풋에 만족할 수도 없었다. 분명 좀 더 많은 노력을 쏟았다면 더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연스레, 이렇게 일을 하는 게 맞는 건지 고민을 하게 되었다.


가만 보니, 조직에서 좀 약았어도 일 잘한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이기심이 덕지덕지 묻어 있던 지랄 맞은 일들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을 수 있는 일에만 집중적으로 투자할 수 있던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못 돼서가 아니라, 자기가 맡은 일을 더 잘 처리해내기 위해 나름의 업무량 조절과 매니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 능구렁이 같은 처사에 가장 직격으로 피해를 입던 사람들의 눈에는 그런 모습이 꼴 보기 싫었을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일을 하는 사람이 더 좋은 성과를 만들어내고 조직에 더 크게 기여하고 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호구입니다.


잘 거절할 줄 알아야 진짜 내 일을 잘 해낼 수 있다. 호구같이 자신에게 오는 업무짬들을 다 받아주면서 정작 자기가 진짜 잘해야 하는 일에 소홀해진다면, 그건 착한 게 아니라 제 앞가림을 못하는 것이다. 잘 거절하는 것은 사회생활에서 너무나도 필요한 능력이다. 특히,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기를 꿈꾸는 (나 같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막상 거절을 하려고 해 보니 그것도 참 쉬운 일은 아니었다. 먼저는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해야 하는 것도 성격에 맞질 않았고, 이 일이 왜 나의 일이 아닌지를 분별하여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려면 조직 전반의 업무 흐름을 잘 읽을 수도 있어야 했다. 그러려면 똑똑하기도 해야 했고, 업무 센스도 뛰어나야 했다.


거기에 추가적으로 거절을 힘들게 만들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내가 거절한 그 일이 나보다 더 착하고, 여리고, 약한 사람들에게 바톤터치 되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직의 구성원들이 만들어내는 지랄의 총량은 바뀔 일이 없으니, 결국 각자의 이기심이 또 다른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었다.




내가 거절한 일들을 받아서 꾸역꾸역 처리하고 있던 다른 호구들(주로는, 나이가 어리고 사회생활이 처음인 나보다 늦게 들어온 계약직 친구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나한텐 감정 노동이었다. 날 너무 힘들게 해서 끔찍하게도 싫어하던 지랄 맞은 사회인의 이기심을 결국 나도 똑같이 행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충분히 나서서 도와줄 수 있는 일이었지만, 나의 일을 더 잘 해내기 위해 그러지 않고 누군가의 힘듬을 그저 방관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일 잘하는 사람이 되는 걸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인지 고민해봤다. 답은 아니었다. 평생 나를 감싸고 있던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그렇게 살지 말라고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호구로 남기로 했다. 남들이 하기 싫은 일, 해도 티도 안나는 일들을 떠안는 것 때문에 마음 상해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그런 일도 내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니까(글을 적으면서도 이런 나 자신이 너무 멍청하다고 생각된다).


대신, 그로 인해 진짜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밀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자연스레 나는 1시간이 걸려야 처리할 수 있는 업무들을 10분 안에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그런 이유로, 한동안 '업무 자동화'에 꽂혀 살았던 적이 있다). 사실,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힘들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에게로 반드시 그 힘듬이 넘어가게 되어있는 조직의 시스템 안에서 나만큼은 이기적이지 않고 싶었다. 일보다 사람이 더 소중하다는 그 믿음만큼은 절대로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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