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기 위한 여정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by Jay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지난 2년 동안 회사생활을 하면서 내가 먼저 면담을 신청했던 적이 거의 없었던 거 같다. 불편하고 힘든 게 있어도 혼자 속으로 삭히는 편이기도 했고, 특별히 곪아서 터져버릴 일 없이 미리부터 잘 신경 써주시기도 했고.


"그래 영재야. 무슨 일이니."


"저 계약 만료까지 한 달 정도 남았는데, 어차피 여기서 정규직 되긴 힘든 상황인 거 저도 알고 있어요. 가능하면 빨리 제 업무들 넘겨받을 사람 정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저도 마음 편히 다음 계획들 준비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계약 만료일까지 한 달 정도 남아있던 상황이었는데 업무 인수인계에 대해 별 얘기가 없으셔서, 결국 내가 먼저 운을 뗐다. 팀장님이 먼저 나서서 내 업무들을 정리하려고 하시기에는 내 감정이 무척이나 신경 쓰이셨을 테니까. 그래서,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팀장님께 먼저 선수치고 말씀드리자, 깊은 한숨과 함께 얘기를 이어가셨다.


"하아(깊은 한숨, 잠시 정적)."


"그래 영재야 미안하구나. 어떻게든 정규직 전환되도록 힘써주고 싶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구나."


팀장님의 '미안하다'는 말에 마음이 쓰였다. 사실, 팀장님이 나한테 미안해하실 건 없었다. 내가 회사에서 쫓겨나는 것은 딱히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릴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이었고, 굳이 나에게 미안해야 할 사람을 찾자고 하더라도 그것이 팀장님이 될 수는 없었다. 팀장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내 정규직 전환을 위해 힘을 써주시던 거의 유일한 분이었으니까. 그걸 내가 알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 모두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상황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전가하며 '미안하다'라고 얘기하시는 팀장님 덕분에 마음이 배로 착잡해졌다.




"그래도 지금 원서 지원한 곳들 중에 한 곳에서 연락 와서 1차 면접 보고 왔어요. 면접 때 나름 답변도 잘했고,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인 거 같아요."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까지 자신 있지는 않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봐야 확률은 반반 정도. 하지만, 내 나름대로 공백기가 생기지 않게 잘 준비하고 있다는 걸 어필해서 팀장님을 안심시켜드리고 싶었다. 내 마음은 불안했고, 쫓기고 있었지만, 그런 속내를 팀장님께 들키고 싶진 않았다(물론, 티가 많이 나긴 했겠지만).


"그래, 잘됐다 영재야. 더 진행되는 내용 있으면 알려주고. 혹시 거기 안되면 주변에 자리 알아봐 둔 곳 있으니 생각 있으면 얘기하고."


마지막까지 챙겨주시려 하는 마음이 감사했지만, 그 호의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면 자리를 옮길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어떻게든 내 힘으로 새로운 자리도 잡고,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해가기 위한 향후 계획까지 마련한 상태에서 이 곳에서의 인연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게 그동안 크고 작은 일들로 함께 동고동락 해오던 동료들과 서로 민망할 것 없이 작별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쓸 데 없이 고집만 센 성격은 어디 안 간다).




나는 대체 가능한 존재인 걸로 판명 났다.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보겠다고 야심 차게 시작했던 계약직 생활의 말미가 기대와 달리 참 초라했다. 이 조직에서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들에 대해 충분히 증명해 보이고 싶었는데, 나는 그 정도로 특별하거나 대단한 사람은 되지 못했다. 당장 다음 달의 거처가 막막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비정규직 제도의 문제점이나 조직의 냉정함 보다도 '나는 아직도 멀었다'는 자괴감이 더 크게 마음을 짓눌렀다.


나도 결국 조직이라는 큰 시스템을 굴러가게 하기 위해 사용된 하나의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의 차별점이라곤 '값이 싸다'는 것 말고는 없었으며, 이는 정규직으로 전환되어 몸값이 올라야 하는 시점에서는 자연스레 희석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 이외에 내가 조직 안에서 하던 모든 업무들은 충분히 다른 사람들로 대체 가능한 것들이었다(내가 없어도 회사는 잘만 굴러간다).


그 사실에 속이 많이 상하기도 했지만, 일단은 수용하기로 했다. 세상 탓, 남 탓, 나라님 탓 등등 탓만 하면서 시간을 축내고 있을 순 없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 건설적이고 희망찬 미래의 모습을 그려가야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더욱 신중하고 치밀하게 다음 수를 잘 준비해야 했다.




지원했던 곳의 2차 면접을 준비하면서, '나'라는 존재가 왜 매력적이고 상품성 있는 인력인지에 대해 논리적인 근거들을 만들어보려고 치열하게 고민했다. 자연스레 지난 2년의 계약직 생활에서의 경험들에 대해 끊임없이 반추해보게 됐다. 과거에 내가 했던 선택과 만들어냈던 결과만큼 '나'라는 사람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까(그 고뇌의 시간 덕분에 이 글들이 나왔다).


지난 2년 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대체 불가능한 존재'에 대한 열망은 항시 나의 부족함과 연결되면서 강렬한 결핍의 감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결핍은 성장을 위한 먹이다. 첫 사회생활에서 부딪힌 냉정한 조직의 섭리와 현실, 실력과 경험이 풍부한 다른 사람들과 나 사이의 격차, 그런 좋은 인재들까지도 현재의 상황과 수준에 쉽게 안주해버리게 만드는 시스템에 대한 염증은 하나같이 '더 악착같이 성장해가야겠다'는 열망에 먹이가 됐다.


나 자신의 수준과 현실 사이의 격차를 끊임없이 직시하는 자기 객관화, 그를 통해 내 안에 충만하게 자리 잡고 있던 결핍, 그 결핍으로 인해 현재의 수준에 쉽게 만족하지 못하고 더 뛰어난 사람이 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는 것.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강점이라고 생각했다. 최종면접 때 그 점에 대해서 최대한 솔직하게 어필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그 점을 좋게 봐주셨던 거 같다. 마지막 최종 면접은 좋은 분위기에서 잘 마무리 지어졌고, 며칠 지나지 않아 합격 통보를 안내하는 메일을 받게 되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최종 합격 통보를 받자마자 팀장님과 선배에게 바로 그 소식을 전했다. 두 분 다 마치 자신의 친동생이 취업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진심으로 축하해주셨다. 만일 내가 제대로 된 곳에 이직을 못하고 계약이 끝났다면 누구보다도 씁쓸하고 안쓰럽게 자리를 정리하게 됐을 텐데, 그런 민망하고 불편한 작별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상황이 잘 매듭지어졌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감사했다.


영화든, 드라마든, 본래 모든 이야기에는 사건사고가 있고,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런 문제도 없이 고요하게만 흘러가는 극이란 건 존재할 수 없다. 그 모든 이야기들이 희극인지, 비극인지를 결정짓는 것은 결국 '결말'이다. 끝이 어떻게 맺어졌느냐에 따라 같은 긴장과 갈등도 더 극적인 해피엔딩을 위한 장치가 될 수도, 반대로 새드엔딩으로 흘러가기 위한 복선이 될 수도 있다. 과정이 어찌 됐든, 결국 끝이 좋아야 다 좋은 것이다.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한 계약직 직원의 스토리는 일단 해피엔딩으로 일단락됐다. 물론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제 막 1막 정도를 끝낸 미완성의 시나리오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열심히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성실하게 노력을 쌓다 보면 충분히 나는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 믿음을 다시 한번 다잡으며, 드라마틱했던 내 2년의 계약직 생활은 일단락됐다.




이직을 하고 새로운 회사에 새롭게 적응하고 있는 지금도 내 각오와 목표는 뚜렷하다. 나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될 것이다. 내가 아니면 안 되는, 다른 사람으로는 도저희 대체되지 않을 나만의 고유한 무엇인가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 마음만큼은 첫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다. 다만, 2년 전과는 다르게 몇 가지 바뀐 게 있다.


먼저는 다른 사람의 인정을 성장의 목표로 삼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성장해간다는 것은 외부적인 시선과 목소리에서 독립되어 그 행위 자체로 이유와 목적이 될 때 흔들림 없이 지속성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나 스스로가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사실 그 자체로 만족하게 됐다. 강력한 내적 동기가 이끄는 성장을 향한 열망이 있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도 더 극적으로 성장해갈 것이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갈 것이다(꼭 그렇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 2년의 경험을 통해,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겠다는 다짐은 단기에 이룰 수 있는 과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더 많은 시간 동안 노력을 켜켜이 적립해가며, 그렇게 야금야금 전문성을 쌓아가야 한다. 때문에, 시간은 필수적인 요소다.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어야지만 다른 사람들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강점이 될 수 있다. 그 생각을 하면서, 호흡을 보다 길게 가져가기로 결심했다.




아직도 내 마음은 결핍으로 충만하다. 더 좋은 사람으로, 더 특별한 사람으로 성장해가고 싶다는 열망은 지금까지도 내 일상에 먹이가 되어 나를 연단시키고 있다. 때문에, 나는 오늘보다 내일을, 올해보다 내년을 더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오늘 하루의 노력이 결국 축적되고 쌓여가며, 결국엔 '고영재'라는 그릇에만 담길 수 있는 특별하고 아름다운 가치가 만들어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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