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새해 첫날까지 묵었던 숙소에서 찍은 것. 글과는 관련이 있는 듯 무관하다. 하지만 내가 이 사진을 좋아한다는 측면에서 연관성을 찾아볼 수도 있겠다.
나는 내 이야기를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독자 혹은 청자가 누구인지는 개의치 않는다. 불특정 다수라도 괜찮다. 이 나이쯤 되면 적당히 포장하는 법을 알아 걱정이 없다. 이뿐만인가. 상대가 흥미가 없어 보이면 적절한 때 그만둘 줄도 안다. 멀쩡한 척 남의 돈을 벌어 먹고살다 보니 고지식한 나도 요령이 많이 늘었다.
엄마는 늘 내게 말은 아낄수록 좋다고 했다. 나도 일정 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타고나기를 그렇지 못하다. 겨울 공기에 건조해진 몸을 벅벅 긁지 않고선 못 배기는 것만큼, 나는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참기 어렵다. 어릴 적 다 써버려서 바닥을 드러낸 인내심을 차치하더라도 또 다른 의문이 있다. 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대체 상대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한단 말인가. 남 이야기보단, 언젠가 약점이 될지도 모를 내 이야기가 낫다고 보는 편이다.
엄마가 내게 그토록 침묵을 요구하기 전 한 번쯤은 왜 내가 시끄러운 사람으로 장성하고야 말았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천성이 수다쟁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처럼 수다 스페셜리스트가 되려면 이를 뒷받침하는 성장 과정이 있기 마련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이해와 수용이 고픈 아이였다. 부모는 내가 무엇을 하든 심드렁했다. 내가 그들에게 7~8(최대 10) 수준으로 불손하게 굴 때만 갖은 수선을 떨었다. 그렇다 보니 ‘부모가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줄 때까지 떠들 수밖에 없었다’라는 것이 홀로 내린 결론이다.
앞자리에 3을 달고도 여전히 쉬지 않고 떠들고 있는 나다. 여태껏 부모가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지 않은 탓도 있지만, 꾸준히 입과 손을 놀린 덕분에 관련 직업마저 얻고야 말았다. 앞서 나를 ‘수다 스페셜리스트’로 명명한 까닭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이번 생만큼은 엄마의 가르침대로 조용히 살 수 없을 것 같으니, 이왕 떠드는 거 끝장나게 떠들어야 하지 않겠나 싶다.
그래서 나는 50일간 매일 나에 대해 짤막하게 이야기할 계획이다. 이른바 ‘좋아해요’ 모음집 되시겠다. 새해 첫날부터 싫어하는 것을 말하기보단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는 게 여러모로 적절하겠다는, 단순한 발상에서 출발했다. 이 프로젝트가 끝날 때쯤에는 내가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도 말, 아니 마음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함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