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데스틴에서 세상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다시 블루밍턴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는데, 팽팽한 전운이 감돌았다. 한국에도 연일 보도되고 있었지만, 미국 북부를 중심으로 영하 20도를 웃도는 강추위와 블리자드 경보가 발생되었기 때문이다.
따뜻한 남녘에서 여행을 마치고 한참 북녘에 있는 집으로 올라가야 하는 입장으로서 상당히 부담이 되었다. 두세 시간도 아니고 11시간이 꼬박 걸리는 거리였기 때문에, 중간에 고속도로에서 폭설을 만나거나하면 정말 답이 없다. 추위는 둘째치고 눈이나 블랙 아이스는 로드트립에 최악의 위험 요소였다. 고속도로에는 특히 거대한 크기의 물류 트럭들이 많아서 미끄러지는 사고가 있을 때 위험이 너무 높아진다. 살아서 집에 가고 싶었다......
일기예보 상에는 목요일 저녁 6시부터 블루밍턴에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고 되어있었다. 순수 운전하는 데만 11시간이 걸리고 중간에 화장실 가거나 기름을 넣는 것을 고려하면 약 12시간 정도 소요될 예정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새벽 6시 전에 출발해야 눈을 피할 수 있다. 하여, 목요일 오전 5시 반에 출발을 하기로 마음먹고 전날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중간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 깬 시각은 2시 반. 본능이었는지 긴장감이었는지 희한하게 남편도 같은 시각에 깼다. 다시 잠에 들까 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우리 그냥 지금 출발해버릴까?"
"그럴까? 지금 갈 수 있을 것 같아"
"가자!"
그 길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빵으로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에너지 드링크도 한 캔 수혈한 채 짐을 싸서 새벽 4시에 출정을 했다. 일찍 출발해서 오후에 눈을 피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옵션일 것 같았다. 즐거운 시간을 보낸 데스틴을 떠나려니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11시간을 쉼 없이 달리는 도전도 새롭고 설레서 파이팅 넘치게 시작을 했다.
11hr 8 min, AM 04:03의 기록
그러나 파이팅 넘치는 기운은 얼마 가지 못했다. 데스틴 시내를 벗어나 국도에 들어서자마자 웬 호러 영화가 따로 없었다. 무슨 놈의 국도에 가로등 하나가 없는지, 새벽이라 차도 한 대도 안 보이고 하이빔을 켜도 워낙에 어두워서 시야가 코앞 밖에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미국 시골 국도에 동물도 많이 출몰한다던데, 언제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 뭐가 보여야 방어라도 할 텐데 이 시야에서 짐승이 튀어나오면 어쩌지 싶어 긴장이 되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어떤 느낌인지 생생하게 느껴질 것 같다.
대 환장의 국도를 두 시간 남짓 짙은 어둠 속에서 달리는데 너무 긴장해서 목덜미가 다 아팠다. 중간에 토끼 한 마리가 뛰쳐나와 길을 가로질러 가는 바람에 너무 놀라 기절할 뻔했다. 길 옆에 사슴이 멀뚱히 서있기도 했다. '제발 뛰어나오지 마라'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어쩜 지나가는 차 한 대도 없는지, 오금이 다 저렸다. 하필 이날이 동지여서, 해도 더럽게 늦게 뜨는 것이었다. 미드를 너무 많이 봤는지 갑자기 피 칠갑한 사람이 튀어나오면 어쩌지 이런 생각도 들었다. 상상이 이렇게나 위험한 것이었다.
한두 시간 반을 달렸을까, 오전 6시 30분쯤 되니 겨우 해가 나기 시작했다. 빛이 들고 시야가 트이자 두려움이 가시면서 긴장이 확 풀렸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진이 다 빠져서 각성이 필요했다. 스타벅스에 들러 커피도 사고 스트레칭도 할 겸 잠시 들러 쉬었다. 출발한 지 3시간 만에 첫 휴식이었다.
커피로 카페인도 충전하고, 바람도 쐬고 다시 출발했다. 아직 남은 시간은 꼬박 8시간, 시간은 오전 7시였다. 평소 같으면 한참 자고 있을 시간인데 이날은 진즉 기상해서 이미 3시간을 달려왔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역시 사람은 급하면 다 하게 되어있나 보다. 그래도 일몰 이후부터는 한결 수월해져서 꾸준한 페이스로 잘 달려가기 시작했다. 비가 조금 오기는 했지만 오히려 흐린 하늘이 운전하기는 편했다.
빠른 속도를 유지하며 달리니 기름이 금방금방 닳았다. 가득으로 충전을 해도, 시속 130km 정도로 5시간 정도 달리면 기름이 바닥나곤 했다. 11시간을 달려야 하니 기름도 자주자주 넣어주었다. 정차하는 김에 맥도날드에서 맥모닝도 먹었다. 몸에는 안 좋지만 장거리 운전에는 커피와 에너지 드링크가 정말 필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한국에 가면 서울-부산 운전 정도는 귀여울 것 같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구름이 많아졌다. 비가 내리는 빈도도 잦아졌다. 다행히 영상의 기온이라 비에서 그쳐서 망정이었다. 아직 운전이 미숙한데 빗길 고속도로를 세 시간 정도 운행해 보니 강제로 운전 실력이 많이 향상된 것 같았다. 눈이 아닌 게 어디냐 하며 다행으로 여겼다.
그래도 침착하게 꽤 많이 올라왔다. 8시간 정도 지나고 오후 2시부터는 비가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블루밍턴 도착을 1시간 30분 정도 남겨둔 지점부터 또다시 시작되었다. 기온이 1도 정도로 아슬아슬한 영상인 상태에서 비가 진눈깨비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비 때문에 얄팍하게 게 젖어있던 도로가 빙판이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앞 유리에 내리는 진눈깨비가 유리창에서 얼어붙는 것이 보이고, 이내 우리 부부도 얼어붙고 말았다. 점점 비가 눈이 되어 눈보라처럼 휘몰아치는 게 눈으로 보였다. 불안한 마음에 계속 아직 눈이 아니라고, 물기가 많다고 우겨도 보았지만 누가 봐도 눈이어서 당황했다. 위 사진에 자세히 보면 앞 유리 사이드 부분에 물기도 점점 얼어서 결정이 되고 있었다.
집을 코앞에 두고 고속도로에서 갇히고 마는 것인가 싶어서 멘붕이 왔다. 차도 제 속력을 내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나아가고 있었다. 마지막 40분 남짓 남겼을 때는 본격적으로 눈발이 날려 정말 무서웠다.
다행히 눈발은 날렸지만 양이 많지 않아 쌓이기 전이라 무사히 집까지 도착했다. 집에 도착한 직후부터 블리자드가 시작되고 기온이 분 단위로 급강하하였다. 집에 들어와 쌓이기 시작한 눈을 보면서, 오늘 새벽 3시에 일어나 출발을 한 것이 신의 한 수였음을 자각하였다. 조금만 늦게 출발했으면 고속도로에 고립되었을 것이었다. 오늘 가장 잘 한 일이다.
생애 첫 미국 로드트립이 이렇게 다사다난하게마무리되었다. 때로는 풍경에 취하기도 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하며 다채로운 경험을 했다. 생애 처음 고속도로 운전도 해보았다. 11시간 거리를 달려본 것도 처음이었다. 눈을 가까스로 피해 집에 무사히 들어왔을 때는 안도감과 안전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여행 직전까지만 해도 조금 지겹고 따분한 블루밍턴이었는데, 밖에서 사서 고생을 하고 와보니 Home-sweet-home이 아닐 수 없다. 집이 최고다.
또, 두렵고 길었던 로드트립 여정을 함께하니 남편과도 돈독하고 쫀득한 전우가 된 기분이었다. 11시간이라는 운전시간을 혼자 소화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운전대도 번갈아 쥐니 11시간도 해볼 만했다. 서로 운전할 때 졸리지 않게 옆에서 쉬지 않고 이야기도 하고, 콘서트도 하고 그랬다. 둘 다 말도 많고, 노래하는 것도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물론 남편은 나의 초보운전이 두려워서 잠들지 '못'한 것이라 했지만, 미화하고 싶으니 그냥 둘 다 의리 있었다고 치부하겠다.
아직까지 이런 고생스러운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청춘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사서 고생하는 여정을 함께 할 동반자가 있어 또한 감사하다. 미국에 있는 동안 더 다채로운 여행을 많이 해보고 싶다. 앞으로 또 다른 여행 일지가 탄생하기를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