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씨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날이다. 여행에서 휴식은 정말 중요한 부분이다. 어제 18km, 3만보 가량 걸었더니 오늘까지도 그 여파가 보통이 아니었다. 앞으로는 하루 최대 2만 보 이상은 걷지 않기로 했다.
아침에 호텔을 나설 때부터 저하된 체력으로 하루를 시작한 나머지, 계획보다 일정을 많이 줄여야 했다. 짧았지만 다이나믹하고 강렬했던 둘째 날의 기록이다.
1. 국회의사당
U.S Capitol
넷플릭스 미국 드라마 '지정 생존자'와 '하우스 오브 카드'에 숱하게 나오는 장소다. 지정 생존자에서는 이 의사당 전체가 다 폭파되는 장면으로 드라마가 시작한다. 실제로 가서 보니 드라마에서보다 훨씬 스케일이 크고 웅장했다. 전날 백악관이 생각보다 많이 작아서 다소 실망했던 것에 비해 국회의사당은 기대보다 한참 크고 으리으리한 느낌이었다.
의사당 주변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인 국회 도서관도 있고, 봄철 벚꽃 명소로 유명한 호수도 있다. 호수를 둘러보는 도중, 한 미국인 할아버지가 다가와서는 사진도 찍어주고 한국 영화를 잘 보고 있다며 한국 영화 추천도 해주고 가셨다. 석조저택 살인사건이라는 생소한 한국 영화였다. 땡볕에서 한참 영화 설명을 듣다가 헤어졌다. 재밌는 할아버지였다. 관광지에서 조우하는 인연들도 여행의 일부려니 생각해 본다.
2. 르봉 카페
Le Bon Cafe
로컬 사람들이 많이 찾는 국회의사당 바로 옆에 있는 브런치 카페다. 아침부터 국회의사당 구경을 하느라 배가 많이 고파서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갔다. 복작복작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주문을 받는 분이 손님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인사를 건네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아 동네 단골손님이 많은 것 같았다.
실내가 보기보다 좁아서 간신히 자리를 잡고 벨지안 와플과 연어샐러드, 그리고 커피를 주문했다. 와플과 샐러드 둘 다 너무 맛있었다. 개인적으로 디씨에 와서 먹은 것 중에 베스트였다. 와플도 폭신폭신하니 달달해서 맛없기 어려웠거니와, 여러 식재료가 잔뜩 들어간 샐러드도 훌륭했다. 다른 메뉴도 한 번씩 다 먹어보고 싶었던 브런치 카페다.
행여나 가게에 정장을 입고 온 사람이 있으면 미국 국회의원인가 하고 의심을 해보았다. 사실, 아무 얼굴도 모르니 검증할 방법이 없다. 모쪼록 음식도 맛있고 동네 주민들 구경하는 것도 재미난 카페였다.
3. 스미소니언 국립 자연사박물관
Smithsonian National Museum of Natural History
배를 채우고 다시 힘을 내어 자연사박물관까지 걸어갔다. 공휴일이라 그런지 입장료가 없었다. 간단한 짐 검사만 마치고 입장할 수 있었다. 입장 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을 올라가자, 이 박물관의 시그니처 동물인 매머드가 반겨주었다. 이 박물관은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배경이 된 곳으로, 어릴 적 재밌게 봐서 그런지 잠시 나이와 체면을 다 잊고 동심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박물관 전시를 너무 잘 해놓아서 남녀노소 누구나 즐겁게 경험하다 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공룡 화석, 실제 거대 동물 크기를 구현해 놓은 작품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널찍한 실내와 큼직큼직한 볼거리들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다. 1층을 구경하고 2층에 올라가니 전날의 피로에 더해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위층은 대충 둘러보았다.
관람을 마치고 다시 숙소로 걸어가기 위해 박물관 화장실에 잠시 들렀다. 공휴일이라 사람이 워낙 많았고, 화장실 역시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로 시장 바닥이 따로 없었다. 체력도 떨어지고, 정신도 산만한 나머지 핸드폰을 칸막이 안에 두고 나오는 대참사를 범했다. 한참을 모르고 나가다가 아뿔싸, 핸드폰의 부재를 알아차리고 혼비백산해서 화장실로 돌아갔으나, 그 칸에 핸드폰은 없었다(으악!). 다급하게 갤럭시 워치로 기기 찾기를 해 보았으나, 잡히지 않았다.
관광객들이 가득한 공휴일, 국립 박물관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리니 '아, 망했다 못 찾겠다' 싶은 생각부터 절로 들었다. 절망 속에서 남편의 핸드폰으로 끊임없이 전화를 거는데, 한참을 받지를 않았다. 그러다 포기를 해야 하나 생각이 들 무렵, 기적처럼 모르는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박물관 경비실인데, 누군가 휴대폰을 찾아서 맡겨놓고 갔다는 것이다...!
누군지 모르지만 너무너무 감사했다. 아직은 살만한 세상인가 보다 싶으면서 안도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다시 한번 누군지 모르지만 감사합니다......!
4. 라이스 바
Rice Bar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천근만근이 된 몸을 이끌고 비빔밥 전문점에 왔다. 피로해서 예정보다 이르게 숙소를 향하는 길에 저녁을 아예 픽업해서 들어가려고 주문을 넣어두었다. 구글맵에서 무려 평점 4.9점에 빛나는 현지 한식당이었다. 갈비 비빔밥을 먹었는데 거의 한국에서 먹는 그런 맛이 났다. 치폴레가 잘 되는 것을 보면서 비빔밥도 저렇게 팔면 잘 되겠다 싶었는데 실제로 이미 그렇게 팔고 있는 가게가 이미 있었다. 모쪼록 익숙한 한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루트는 비교적 심플했지만 복작복작하고 우여곡절이 많았던 하루였다. 개인적으로 즐겨봤던 영화와 미드의 배경이 되었던 곳에 실제로 와서 보니 더 재밌었던 것 같다. 워싱턴 D.C는 전반적으로 도시가 깔끔하고 정돈도 잘 되어있어 쾌적한 인상을 받았다. 또, 잃어버린 핸드폰도 무사히 되찾을 수 있어 감사했다. 워싱턴 DC에서 짧지만 좋은 인상을 받은 채 내일은 뉴욕으로 넘어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