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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은 누구에게 닿을 수 있을까

수신인 없는 그림, 그리고 나

by 송알송알

내 그림은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오래도록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


내 삶에서 처음으로 그림을 기억하는 건 7살 때였다.

나는 머리를 양 옆으로 묶은 소녀를 그렸다.

머리는 바람에 흩날리듯 휘날렸고, 코에는 입체감을 주고 싶어서 콧날과 콧망울을 그려 넣었다.


그림을 그리고 칭찬을 받았다.

‘표현’과 ‘고민’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던 날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저 그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

‘칭찬받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내가 그림을 어렵게 느끼기 시작한 건

어딘가에 ‘닿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예쁜 유리병에 편지를 넣어 바다에 던지는 기분.

내 그림이 바다 어딘가로 흘러가긴 했지만

어디에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건

수신인을 정하지 않고 그림을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나조차 어디로 보내야 할지 모른 채

그리고, 또 그리고, 보내고, 다시 그리고…


블로그에 그림을 올리기 시작한 건

꾸준히 그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랍에 쌓여만 가는 편지들보다,

목적지 없이라도 일단 보내보는 게 더 낫다고 믿었다.


내 블로그는 망망대해가 아닌 작은 호수였다.

반대편 물가에 다정한 친구들이 있는, 조용한 호수.


그림이 하나씩 쌓일 때마다

고등학교 친구, 대학 동기들이 댓글을 남겨주었다.


“이거 너무 귀엽다.”

“너 그림 계속 그렸구나, 멋지다.”


그 반응이 그냥 인사치레로 여겨졌다.

그림을 응원하는 건지,

나라는 사람을 응원하는 건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내 창작물에서 나 자신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는 것.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 워홀을 빼고 사랑할 수 있을까?


나에 대한 응원도,

그림에 대한 응원의 일부였다.


내 존재를 향한 격려도,

그림을 향한 칭찬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에게 닿아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물어야 할 차례다.


“내 그림은 누구에게 닿고 싶은가?”

“누구에게 필요한가?”


그동안 나는

수신인을 정하지 않고 그림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은

막연한 호수를 넘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그래도 아직, 잘 모르겠다.


수많은 질문 끝에

결국 나는 다시

수신인 없이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또 한 번 유리병에 넣어

세상 어딘가로 조심스레 띄워 보낸다.


누군가에게 닿기 위한 그림을.

언젠가 그 답장을 받을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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