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은 다 위선자일까?– 호밀밭의 파수꾼

경계선적 사고로 세상을 버티던 홀든의 성장 이야기

by Vee

세상이 다 가식처럼 느껴질 때

뚝뚝, 선명한 피가 얼굴에서 흐릅니다. 그래도 홀든은 멈출 수 없습니다. 추위에 상처 난 얼굴이 아프지만 계속 걸어갑니다. 기차역으로... 뉴욕으로 가야 하니까요.

홀든은 방금 학교에서 도망치듯 나왔습니다. 다들 너무 가식적(phony)이어서 더는 어울릴 수가 없었거든요. 아니, 그는 모든 게 견딜 수 없습니다. 세상은 위선자들 뿐이에요. 아무하고도 어울리고 싶지가 않아요.


’호밀밭의 파수꾼‘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우리 모두 한 번쯤 겪었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질풍노도의 시기라고도 하죠. 바로 사춘기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춘기는 아닙니다. 벌써 네 번째 학교에서 쫓겨났는걸요. 이번 학교도 그에겐 가짜들만 우글거리는 곳입니다.


그는 왜 모두가 가식이라고 하는 걸까요? 그의 논리에 따르면 세상은 순수 vs 가식 이렇게 나누어진 것 같아요.

오늘은 세상을 흑백으로 보는 그의 '경계선적 사고(splitting)'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세상엔 '좋음'과 '나쁨' 밖에 없어

홀든은 한순간의 행동이나 말투 하나만 보고, “저 사람은 형편없어”라고 결론 내려버려요.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세상을 흑백으로 나누는 ‘경계선적 사고(Splitting)’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경계선적 사고는 “사람이나 상황을 ‘전부 좋거나’, ‘전부 나쁘거나’로만 나누는 사고방식”입니다. 중간이 없고, 애매함을 견디지 못하는 거죠. 실망하고 상처받기 싫어서 아예 단정 지어버리고 거리를 두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 경계선적 사고, 어쩐지 익숙하지 않나요?

바로 사춘기에 누구나 겪는 심리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혼란스럽고, 감정은 순식간에 요동칩니다. 누군가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아, 아예 기대를 끊거나 나를 완전히 이해해 주는 사람만 내 편이라 믿게 됩니다.


다행히 이런 사고는 사춘기의 발달적 특징으로, 성숙해 가며 자연스럽게 변화합니다.

다양한 감정과 사람을 복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관계 안에서 실망이나 다툼을 견디는 힘이 생기며

흑백 사이의 회색을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홀든 역시 이 변화의 시작점에 있는 인물입니다. 처음엔 모든 사람을 가식이라 단정했지만, 마지막엔 그렇게 싫어하던 친구들조차 그립다고 말하니까요.



사람을 단 하나의 모습으로만 판단할 때

홀든은 왜 피를 흘리고 있었을까요? 그는 자신의 룸메이트 스트래들레이터와 싸운 직후였습니다.

스트래들레이터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학생입니다. 인기 없는 애클리에게도 인사를 건네고, 깔끔하게 차려입으며, 여자아이들과 데이트도 자주 합니다. 하지만 홀든에게 그는 전형적인 '가식적인 어른 흉내를 내는 10대'입니다.


스트래들레이터가 홀든이 예전에 좋아하던 제인과 데이트를 하게 되자, 홀든은 극도로 불안해집니다. 제인은 홀든에게 ‘진짜’였고, 순수의 상징이었거든요. 그런 존재가 위선적인 사람과 연결되는 걸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집요하게 스트래들레이터를 몰아붙입니다. 데이트에서 무엇을 했는지, 왜 늦게 들어왔는지. 스트래들레이터는 참으려 하지만, 홀든은 결국 그를 "멍청이"라 부르고, 두 사람은 싸우게 됩니다.


스트래들레이터는 사실 그렇게 나쁜 인물은 아닙니다. 애클리에게도 예의를 지키고, 친구로서도 어느 정도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니까요. 하지만 홀든은 그 복합적인 면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신뢰하지 않았고, 단 하나의 행동으로 전부를 판단합니다.


바로 이것이 경계선적 사고입니다. 한 가지 단서로 사람 전체를 판단하고, 단점을 발견하면 마음을 완전히 닫아버리는 사고방식이죠.



위선적인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

홀든의 세계관 이분법적인 사고는 어른과 아이를 나누는 데에서도 드러납니다. 홀든은 모든 어른이 위선적이라고 단정하고, 아이들만이 순수하다고 믿습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건 가치 판단 같지만, 그 속엔 다음과 같은 감정이 숨어 있어요.

“나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
“내가 지키고 싶은 순수함을 어른들은 자꾸 망쳐.”
“그러니까, 어른은 다 나쁜 거야.”


이처럼 세상을 ‘아이의 순수함 vs 어른의 위선’으로 나누는 건,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정리해 마음의 불안을 줄이려는 방식입니다. 이 또한 경계선적 사고의 한 형태예요.


사실 홀든은 실제로 상처를 많이 받은 아이입니다.

동생 앨리의 죽음 후 어른들에게서 위로받지 못했고, 친구의 자살을 학교가 가해자 퇴학처리로 무심히 넘기는 걸 보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애초에 어른들을 다 나쁘다고 믿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정리해 버리는 방식 역시 경계선적 사고의 일환입니다.



아이의 순수함만은 지켜주고 싶은 마음

그런 그가 유일하게 마음의 안정을 찾는 사람은 여동생 피비입니다. 피비는 홀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아이예요.

홀든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뭐가 되고 싶냐고 묻는 피비에게 이렇게 대답하죠.


나는 어떤 미친 절벽 가장자리에 서있어...
꼬마들이 어디로 가는지 보지도 않고 마구 달리면
내가 어딘가에서 나가 꼬마를 붙잡는 거야...
나는 그냥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그런 노릇을 하는 거지


이 장면은 소설 전체에서 가장 상징적인 대사예요.

홀든은 아이들이 ‘어른’이라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막고 싶은 거죠.

동시에 나는 더러워진 세상과 어른이 되기 싫고, 아직 순수한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이에요.



떨어져도 괜찮아

홀든은 영원히 어른의 세계를 거부할 수 있을까요?

소설의 마지막 그는 피비가 회전목마를 타는 걸 지켜봅니다. 피비와 다른 아이들 모두 회전목마에 있는 황금고리를 잡고 싶어 합니다. 잡으려다 떨어질 수 있어 위험한데 말이죠.


홀든은 그저 가만히 지켜봅니다.

꼬마들이 황금 고리를 잡고 싶어 하면
그렇게 하게 놔두고 아무 말하지 말아야 한다.
떨어지면 떨어지는 거다


과거의 홀든은 절대 떨어지게 놔두면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완벽하게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이제는 아이들이 스스로 부딪히며 자랄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절벽 아래가 전부 나쁜 것도 아니고, 어른이 되는 것이 타락도 아니라는 걸요.


그리고 그제야 그는 인정합니다. 스트래들레이터도, 애클리도, 보고 싶다고.

그리움은 이해의 시작이죠. 홀든은 더 이상 완벽한 세계만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경계선적 사고에서 벗어나 그는 어른이 되기 시작한 거예요.



경계선적 사고에서 벗어나려면

홀든처럼 세상을 두 갈래로 나누어 보는 마음, 사실 우리도 종종 겪습니다.

누군가에게 실망한 순간, “역시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어.”

처음 본 사람이 너무 마음에 들어, “이 사람은 진짜야!” 하고 단정 짓는 순간.

이런 사고는 일시적으로 마음을 정리해 주지만, 관계를 왜곡시키고, 감정을 더 극단으로 밀어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다음과 같은 연습이 도움이 될 수 있어요.

1. 단정 짓는 생각 멈추기

“얘는 나를 무시했어.” “그 사람은 다 가식이야.”

이런 생각이 들 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라고 잠시 멈춰보세요.

단정보다 질문이 관계를 살립니다.


2. 중간 지대를 연습해 보기

사람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을 함께 지닌 존재예요.

“이 사람은 좀 자기중심적이지만, 그래도 진심은 있는 것 같아.”

이런 회색 문장을 떠올리는 연습이 회복의 시작이 됩니다.


3. 감정을 스스로 조절하는 연습

홀든처럼 마음이 크게 흔들릴 때,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어떤지 스스로 알아차려보세요.

화, 서운함, 외로움이 섞여 있는지도 모릅니다.

감정을 언어로 구체화하면 충동이 줄어듭니다.


4.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

내가 단정 지은 ‘그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스트래들레이터는 정말 나쁜 친구였을까요,

아니면 그냥 어른스러워지려 애쓰던 10대였을까요?

이 질문이 감정을 조금 더 너그럽게 만듭니다.


5. 나 자신에게도 유연해지기

경계선적 사고는 때때로 나 자신에게도 적용돼요.

“나는 왜 이렇게 예민해?” “난 진짜 못났어.”

이럴 때는 이렇게 말해보세요.

“지금은 조금 힘들지만, 나도 괜찮은 사람이야.”


홀든이 그랬듯, 우리는 결국 흑과 백 사이의 세계를 살아갑니다.

그 사이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가끔 실망시키는 나 자신도 있습니다.

그 회색을 견디고 받아들이면 우리도 홀든처럼 성장할 수 있을 거라 믿어요.



매주 목요일 고전 속 심리에 대해 연재하고 있습니다.

다음엔 어떤 인물의 마음을 들여다볼까요? 여러분에게 작은 위로와 통찰을 주는 글을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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