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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다

소설 <거기서 페리를 만나> | 포르투 편 : 10 화 完

by 성게를 이로부숴



“여보세요?”


“Hallo?”


“저기, 그 포르토에서.”


“아.”


잠에서 깬 목소리.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을 전하는 기쁨에 미처 시차를 고려하지 못했다.


“지금 거기는 많이 늦었죠?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페리는 예의 침착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간간이 잠에서 깬 사람이 내는 한숨 같은 소리가 들렸다.


“내일 독일로 떠납니다.”


나는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여행을 끝내길 바랐는데요.”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조각상 말이에요…. 그런 걸 보러 여행을 한다는 게 사실 이해가 잘 안 됐거든요. 근데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목적 없이 집을 떠나는 건 위험합니다.”


“시간 되면 식사라도 해요.”


“좋은 여행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럼.”


물론 페리에게 어떤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 정도로 무미건조한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페리에게 독일에 도착해 시간이 나면 연락을 남기겠다, 깨워서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난생처음으로 아주 긴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이 여행의 끝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겨울 새벽, 캐리어를 끄느라 칼바람이 무색할 정도로 땀을 흘리며 도착한 공항 리무진 역.


벌써 신혼부부 한 쌍과 아웃도어웨어 차림의 아주머니, 큰 이민가방을 두 개나 곁에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세 모녀가 먼저 줄을 서 있었다. 곧 흰색 승용차에서 배웅을 받으며 아주머니 한 분이 내렸다. 리무진 도착 시간에 딱 맞춰 머리를 매우 정갈하게 다듬고 고급스러운 코트를 걸친 중년 남자가 사람들과 살짝 거리를 두고 섰다. 줄을 섰다고 하기보다 다른 역에서 서 있는 사람 같았다. 남자는 번쩍이는 금장 손목시계를 반복해서 들여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공항 리무진이 도착하자 사람들은 각자의 짐 손잡이를 힘주어 움켜쥐었다. 누구도 아무것도 없이 여행을 떠날 수 없다. 때가 되면 자야 하고 먹어야 한다. 맨 몸으로 여행을 하는 것은 시베리아의 호랑이나, 아무르의 표범, 툰드라의 이끼를 뜯어먹는 엘크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나는 페리의 단출한 여행가방을 떠올렸다. 주머니 속 노트 한 권, 가뿐하게 들쳐 맨 가죽 배낭. 겨울 내내 그 회색 코트만을 입고 있을 것 같은 심플한 페리. 실제로 그가 어떤 일상을 살고 있는지는 만나서 확인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짐을 싣는 칸을 열기 위해 리무진 기사가 내렸다. 그는 무표정했지만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지금 리무진이 만석이어서 3분 밖에는 더 타실 수가 없네요. 다음 차는 40분 뒤입니다. 다음 차를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혼부부로 보이는 커플의 남자가 자신들이 가장 먼저 역에 도착했다 주장했다. 두 자매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물러났다.


‘다음 리무진도 이런 상태라면….’


“아저씨 여기요. 한 명이요.”


금장 손목시계를 찬 남자는 무신경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미 한 발은 이미 리무진 속으로 밀어 넣은 채다.


“저기요. 가장 늦게 오신 것 같은데요.”


캐리어들을 리무진에 넣던 신혼부부가 거들었다.


“맞아요. 이 분들이 저희 다음으로 오셨어요.”


신혼부부는 두 자매를 가리켰다. 리무진 기사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지 별 표정 없이 말을 이었다.


“어떤 분이 타십니까?”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자리는 두 자매가 양보를 하면서 아웃도어웨어 아주머니에게 돌아갔다. 뒤로 물러난 리무진 기사에게 두 자매가 다가갔다.


“저기 기사님, 정말 죄송한데요. 혹시 짐 하나만 리무진에 실을 수 있을까요? 택시를 타고 바로 따라갈게요. 아무래도 다 실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다음 버스에 자리가 꼭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 그렇게는 안될까요?”


“그래 그래. 이렇게 무거운 짐을. 내가 짐이 별로 없으니까, 내 거라고 생각하고 넣어주세요.”


아웃도어웨어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도왔다. 순발력을 발휘한 약삭빠른 판단이었다. 리무진 기사는 흔쾌히 승낙했다. 오만한 표정으로 먼저 리무진에 오르던 남자의 시도는 무산됐다. 두 자매는 커다란 이민가방을 야무진 몸짓으로 밀어 넣었다.


“저기, 괜찮으면 제가 우리 남편을 부를 테니까 같이 공항으로 가겠어요?”


가장 마지막으로 흰 승용차에서 내렸던 아주머니가 자매에게 제안했다.


“제가 같이 타도 되겠습니까?”


뻔뻔한 금장시계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는 무신경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몸짓에는 어쩐지 위협적인 느낌이 있었다.


아주머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금장시계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세 분이 타시면 자리가 다 차는데…. 죄송해서 어떡하죠. 제가 다 모시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아저씨, 저랑 같이 택시 타실래요?”


나는 남자에게 택시에 동승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 남자는 내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 차에 자기가 타면 안 되겠냐고 재차 묻고 있었다. 막무가내인 사람이다. 나는 택시를 불렀고 세 모녀를 태운 흰 승용차는 공항으로 출발했다. 리무진 역에 남겨진 뻔뻔한 금장시계는 그제야 관심이 있는지 다가왔다. 택시가 도착하자 그는 더 묻지도 않고 곧장 뒷좌석에 가 앉았다. 그는 짐을 싣는 동안에도 재차 시계를 보며 고개를 휘저었다. 나야 이륙시간이 넉넉했기 때문에 여유를 부리며 짐을 실었다.


“일찍 공항에 가시는 분들이 많았나 보네요. 리무진을 놓치면 꽤 기다려야 하니 참 난감하죠.”


택시 아저씨는 어색한 공기를 부수려 일부러 말을 걸었다.


“그러게요. 공항에 가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네요.”


대답을 하며 슬쩍 돌아보았다. 금장시계는 아무 대꾸도 않았다.


“여행이십니까? 아니면 출장?”


택시 아저씨는 계속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지만 금장시계는 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여서 일부러 크게 대답했다.


“아, 저는 여행이에요. 독일에 가는데…. 이번엔 좀 오랫동안 여행을 해 보려고요.”


기사 아저씨는 뒤에 앉은 금장시계를 백미러로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내가 뒤를 돌아보자 남자는 손에 낀 커다란 금반지를 보여주었다. 잔뜩 의기양양했다. 그는 한국어에 서툰 척 잔뜩 꼬부라진 발음으로 말했으나 어순과 억양이 완벽했다.


“로텐쉴트 문장인데. 보신 적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은 정말 멋진 나랍니다. 돈만 있으면 뭐든 가능하죠. 시간이 충분하다면 더욱 그렇고요.”


문득, 잔뜩 돈을 쓰는 이런 긴 여행을 떠나는 게 정상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택시는 아파트 단지의 그 많은 횡단보도 신호등 하나에도 걸리지 않고 순행했다. 금장시계를 찬 남자는 자신의 부와 남아도는 시간에 대해 말했다.






국제터미널 택시 정차장에 들어서자 아스팔트에 하얗게 내린 서리가 아침 햇볕에 반짝였다.


만족스러운 설렘이 다시 밀려왔다. 돈과 시간이 넉넉한 남자는 회색코트를 입고 있었다. 페리가 떠올랐다. 그는 금장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휘저었다. 의아할 정도로 뻔뻔해서 어떻게 보면 동정의 마음이 드는 희한한 사람이었다.


멀리서 흰 승용차를 타고 온 아주머니가 손을 흔들었다.


“잘 도착했네요. 택시가 좀 더 빨랐네! 어유 아침부터 그죠? 리무진 타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 알았겠어요? 시간 괜찮으면 커피라도 할래요?”


금장시계만 쏙 빼놓자니 마음에 걸렸다.


“저랑 같이 타고 오신 아저씨도 불러오겠습니다. 괜찮으시죠?”


“그럼요. 같이 와요.”


두 자매 중 조금 더 키가 큰 여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날렵한 몸짓으로 지나갔다. 금장시계는 출입문 바로 옆에 서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저기, 아까 리무진 역에서 뵀던 분들을 만났거든요. 같이 커피라도 한 잔 하자고 하시는데, 거기로 가시겠어요?”


내심 거절 하길 바랐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리무진을 탈 뻔 한 우리들은 얼떨결에 출국장 H와 I 사이에 있는 작은 간이 카페에 둘러앉았다.


“블랙커피로.”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지시를 내리듯 말을 뱉더니 금장시계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바라보고 고개를 저었다. 거기 있는 모두 금장시계의 행동에 의아한 듯했지만 그저 미소를 지었다.


“엄마가 사신대요. 뭐 드시겠어요?”


자매 중 한 명이 일어났다. 나는 함께 일어났다.


“같이 가시죠.”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가 물었다.


“여행 가시는 거예요?”


순한 인상에 비해 힘 있고 결이 굵은 차분하고도 명료한 목소리였다. 절로 마음이 가라앉는 침착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네. 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더 큰 가방을 가지고 가시는 분도 있네요.”


“저희가 외국에 있다 보니 올 때마다 가지고 갈 것이 많아요. 엄마는 뭐든 다 싸 주시는데 안 가지고 갈 수가 없어요. 가면 다 필요하기도 하고요.”


“어디 계시는 건가요?”


“독일이요.”


“그래요? 같은 비행기 일 수도 있겠다. 혹시 프랑크푸르트로 가요?”


같은 곳으로 가는 사람을 알게 되어 기뻤다. 독일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볼 수도 있는 인연이 될지도 몰랐다. 대답을 미루는 것 같은 그녀의 편을 들 듯 카페 아르바이트 생이 나를 보고 말했다.


“커피 나왔습니다.”


“혹시, 여행하기 좋은 곳 있으면 추천해 줄 수 있어요?”


“일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베를린도 좋고, 드레스덴도 좋고…. 함부르크도 좋아요. 북쪽으로 가신다면 덴마크를 들르는 것도 좋고요. 드레스덴은 프라하가 가깝고, 뮌헨은 스위스가 가까워요. 스트라스부르크는 프랑스가 가깝고요. 추천 보단 가고 싶은 곳으로 가시는 게 좋지 않으시겠어요?”


그녀는 매우 친절하고 부드러워 보였지만 쌀쌀맞은 대가 있었다. 그녀는 엄마에게 먼저, 그리고 흰색 승용차 아주머니, 금장시계 순으로 커피를 나누어 주었다.


“그래 둘은 떨어져 있는 거예요? 자매가 떨어져 있어서 어째. 같이 있으면 엄마 마음이 훨씬 좋을 텐데.”


흰색 승용차 아주머니가 묻자 자매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자매는 외모로는 별로 닮은 구석이 없어 보였는데 냉정한 분위기가 묘하게 닮아 있다.


‘코 모양이 냉정해 보일 수 있는 걸까.’


“그럼.”


금장시계가 벌떡 일어섰다. 그에게 다른 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금장시계는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인사를 건넸다. 당당하고 무신경한 남자의 얼굴에 다소 무거운 세월의 흔적이 떠올랐다 금방 사라졌다. 곧 모두 짐을 부쳐야 한다며 일어섰다. 나는 아직 여유로웠다.






‘가고 싶었던 곳으로….’


어떤 식으로 여행을 해야 할지 정해야 했다. 사실 그런 고민도 없이 결정한 여행이었다.


‘페리에게 물어볼까?’


페리와 함께 라면 먹거나 마셔 보기 위해, 체험하기 위해, 무엇을 하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됐다.


‘책을 사야 하나.’


책과 페리. 그 둘은 닮은 데가 있었다. 도서관에 파묻힌 책들 같은 오래된 고요. 그 둘은 말을 걸 때마다 더 상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만의 속도로 펼쳐 보이는 누군가의 인생. 현명한 조언자의 입을 통해 끝없이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이 필요했다. 매일 어디로 가야 할지 스스로 고민해야 하는 긴 여행이 실감 났다.


지금까지의 습관을 몽땅 던져버려야 하는 이토록 단호하고 충동적인 결정. 아마 비행기 표의 가격을 신중히 비교하거나 다음 숙소들을 알아보는 데 시간을 쏟았다면 내리지 못했을 것이었다. 완벽을 기해 계획하면서 우리는 인생의 가장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지도 모른다. 가장 중요한 결정들은 때때로 단번에 내려지며, 되돌아보면 마치 하늘의 계시처럼 완벽하고도 기묘한 타이밍에 후회 없이 치러진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식사시간이 되어 눈을 떴더니 으슬으슬한 공기에 굳어진 몸이 뻐근했다. 비프와 치킨 사이에 얼마간 고민하는 동안 내 차례가 되었다.


“죄송하지만, 막 비프가 다 떨어졌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냥 치킨으로 주세요.”


고민했던 것과 상관없이 맥주와 치킨을 선택했다. 이륙하고 얼마 되지 않아 쉬지 않고 와인을 마시던 앞 좌석 여자가 인사불성이 되어 잠든 바람에 좌석을 올리지 못해 매우 불편하게 음식을 먹었다. 옆 자리에 앉은 중년 부부가 좌석에 거의 갇힌 듯한 내게 안쓰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우리는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예요. 여행 가는 건가요? 아니면 유학?”


“여행이에요. 오랜만에 아드님을 만나시겠어요.”


“그렇지요. 어렸을 때 유학을 보내 놔서 아주 거기에 자리를 잡았으니…. 우리 아들하고 비슷한 또래 같아 반갑네요. 우리 아들은 외국에서 오래 살았는데도 꽉 막힌 데가 있어서 그저 열심히 사는 데만 정신이 팔렸지요. 우리 아들하고 비슷한 나이에 그런 긴 여행을 계획하다니 대단한데요? 안정적으로 사는 삶 보다 어떨 땐 그렇게 무턱대고 시도한 일들이 또 새로운 경험이 되기도 하는 건데…. 그렇지요?”


요즘 같은 치열한 시대에 목적 없는 여행을 결심한 나를 신기하게만 여기는 노부부와 더 이상의 대화를 그만두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느 정도 매우 이상한 여행이라 별로 변호를 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세상에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여러 모양으로 함께 살고 있다.






밖으로 어둑어둑한 하늘이 보였다.


시차가 실감 나지 않았지만 손목시계는 미래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본격적인 여행의 설렘. 새로운 빛깔의 지붕, 오래된 도시의 성과 벌판, 촉촉하게 젖은 돌길을 걷는 상상이 드디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포르투의 갓 딴 레몬을 떠올렸더니 입에 군침이 돌았다. 드디어 승무원들이 이어폰과 담요를 걷어갔다.


“우리는 이제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착륙합니다. 프랑크푸르트에는 눈이 내리고 있으며, 기온은 -5도입니다. 저희 항공사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여행 되십시오.”







<거기서 페리를 만나> 포르투 편





성게의 말 :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장편소설 시리즈 첫 권이 완결되었네요.

이렇게, '끝나지 않는 노래'는 시작되었습니다.

<거기서 페리를 만나> - '북쪽의 도시들'로 돌아오겠습니다.

기묘한 그림자들의 이야기와 회색코트의 비밀을 기대해 주세요!


참, 저는 몇 시간 뒤 포르투로 떠납니다.

두로 강으로 내려가는 햇볕 잘 드는 골목에서 페리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군요.


모두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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