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樂 투어>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 2탄
이 글은 <도시.樂 투어>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 1탄 "꽃보다 피렌체"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프란체스코 란디니(Francesco Landini, ca.1325-1397)는 14세기에 피렌체에서 활동한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다. 피렌체에서 북동쪽으로 8킬로미터쯤 떨어진 피에솔레(Fiesole) 근처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며, 사실 태어난 시기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기록이 귀한 시기일수록 역사적으로 음악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음악가의 유명세나 권력과의 긴밀함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성 로렌초 성당에서 란디니의 무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피렌체에서 활동한 란디니의 유명세와 성 로렌초 성당과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았던 란디니는 시력을 잃었고, 그에 비해 화려한 연주력과 즉흥연주를 선보였기에 더욱 유명세를 탔을지도 모른다. 당시 몇몇 기록에 "마치 그가 눈을 뜨고 연주하는 것처럼 매우 빠르게 연주했다"라고 하니 말이다. 란디니 스스로는, 앞을 볼 수 없어 암흑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오르간 연주를 하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데 이유야 뭐였던지간에 그에게 오르간은 뗄 수 없는 마치 분신과도 같은 악기였으리라.
무덤 왼편, 그의 모습을 담은 부조 조각, 그 주위를 빙 둘러 쓰여있는 라틴어 글귀에도 ‘프란체스코, 그는 시력은 잃었지만 마음으로 곡을 작곡하고 오르간으로 선율을 연주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음악으로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주었으며, 이 곳에 재가 되어 묻히지만 그의 영혼은 별이 되었다"라고 쓰여있다. 마치 성 로렌초 성당에 묻힐만한 인물임을 강조하듯 말이다.
란디니는 성 트리니티 성당(Basilica di Santa Trinita)에서 약 4년간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한 이후 1365년 성 로렌초 성당으로 옮겼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곳에서 봉직했다. 그러는 동안 지금의 피렌체의 두오모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오르간 제작에도 관여했다.
그가 다룰 수 있었던 악기는 오르간뿐만이 아니었다. 그 중 하나가 란디니가 고안했다고 알려진 시레나 시레나룸(syrena syrenarum)이라는 악기며, 현을 퉁기면서 연주하는 기타 모양이다. 당시 작곡가, 연주가는 뚜렷한 구분이 없어 작곡가가 연주하고 또 연주가가 작곡을 했고, 연주가 가능한 사람들은 특정 악기를 아주 잘 다룬다 하더라도 그 외에 몇 개의 악기를 더 다룰 수 있었던 것이 어느 정도 일반적이었던 모습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란디니의 능력은 아마도 그가 가진 장애로 인해 더욱 부각되었을지도 모른다.
피렌체에서 북서쪽으로 멀지 않은 프라토 출신의 지오반니 게라르디 다 프라토(Giovanni Gherardi da Prato, ca. 1367-1445)가 쓴 미완성의 시 '알베르티의 천국'(Il Paradiso degli Alberti, ca. 1425)에서도 란디니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다. 마치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처럼, 이 시는 1389년 피렌체에 여러 명의 지식인들이 모여 다양한 주제와 관련된 얘기들을 풀어나가는 것이 주 내용인데, 그중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가 란디니에 의해 풀어내어지면서 그가 주력했던 발라타(ballata)의 가사들이 언급된다.
란디니는 많은 세속 음악을 남겼고, 곡과 더불어 그가 남긴 시들은 종종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 ca.1300-1377)와 비견된다. (참고, 마쇼를 잊지마쇼) 또한 프랑스 지역에서 이전과 다른 아르스 노바(Ars Nova)로 불리는 새로운 예술과 음악이 퍼져나가고 있었고, 란디니가 활동한 시기를 이탈리아의 아르스 노바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초기 르네상스와 16세기 베네치아 악파를 중심으로 음악이 발전하는데 있어 란디니의 음악 스타일이 이후 시기적으로나 음악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 때문이다.
발라타(ballata): "춤을 추다"라는 의미의 발라레(ballare)에서 파생된 것으로 노래에 춤이 동반되었다. 13세기의 발라타는 합창으로 이루어진 후렴구가 있는 단성으로 된 노래의 형태였고, 14세기 초기에는 변화되어 이후 다성음악의 형태를 보인다. 란디니가 남긴 발라타는 약 140곡 정도로, 이는 이탈리아에서 발견된 이 시기의 발라타의 1/3 을 차지한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이 산타 레파라타(Santa Reparata)라는 성당이 위치하던 곳에 다시 지어지기 전까지, 성 로렌초 성당은 역사가 가장 오랜 성당이자 피렌체의 두오모로 불리고 있었고, 메디치 가문이 힘을 가지고 발휘하던 그때부터 메디치 가문의 본당이 되었다. 이 오래된 성당은 15세기에 보수 및 증축 작업이 이루어졌고, 바로 옆에 메디치 라우렌치나 도서관(Medicea Laurenziana Biblioteca)이 있다.
14세기 이탈리아 음악은 1300년대라는 '밀레 트레첸토'(mille trecento)의 의미를 붙여 ‘트레첸토(Trecento) 음악’이라고 부른다. 굳이 특별하게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전 시기와 다른 음악적 특별함이다. 13세기까지만 하더라도 프랑스 지역에서 보이는 리듬 변화와 복잡함이 중요한 요소였고, 그에 따른 음악 발전이 기록으로 남았다. (참고, 노트르담 음악가들의 음악 기록하기) 그러나 이탈리아 지역의 음악가들은 리듬보다는 선율 자체가 가지는 유려함에 더 집중했고 보다 더 풍부하게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훗날 그들의 음악이 실제로 그러했는지, 지역에 따라 비교할만한 눈에 띄는 차이가 있었는지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소리'라는 특성상 음악은 구전되거나 기보 되지 않으면, 본래의 모습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녹음 기술은 당연히 없고 음악이 인쇄 조차 되지 않았던 이 시기에는 하나하나 손으로 베껴 쓰고 기록하는 '필사'에 의존하여 음악이 전해졌다. 그래서 음악 그 자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필사본이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외에 활자로 된 기록들도 음악사의 빈 공간을 메우는데 큰 역할을 하지만.
14세기 이탈리아 음악 역시 필사본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대표적인 사료가 바로 '스콰르치알루피 필사본'(Squarcialupi codex)이다. 이 특별한 이름은 필사본을 발견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인 안토니오 스콰르치알루피(Antonio Squarcialupi, 1417-1480)의 이름을 딴 것으로, 이 필사본은 13-14세기 음악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손꼽힌다.
필사본은 당시 활동했던 명망 높은 다수의 작곡가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고 있으며, 이렇게 삽화가 있는 부분은 다채롭고 매우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있다. 특히 란디니가 그려져 있는 부분을 보면, 란디니가 이동형 오르간(portative organ, 혹은 작은 오르간이라 하여 organetto라 불림)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앉아있는 모습과 악보 가장자리 주위 장식에 당시에 사용되던 악기의 그림까지도 함께 볼 수 있다.
스콰루치알루피 필사본에 수록된 곡과 함께 밝혀진 작곡가로는, 지오반니 다 카시아(Giovanni da Cascia, 1270-1350), 야코포 다 볼로냐(Jacapo da Bologna, 1340-1386), 게라르델로 다 피렌체(Gherardello da Firenze, 1320-1360), 빈센초 다 리미니(Vincenzo da Rimini), 로렌초 마시니(Lorenzo Masini), 파올로 테노리스타(Paolo Tenorista), 도나토 다 피렌체(Donato da Firenze), 니콜로 다 페루지아(Niccolò da Perugia), 바르톨리노 다 파도바(Bartolino da Padova), 프란체스코 란디니, 자카라 다 테라모(Zacara da Teramo), 안드레아 데 세르비(Andrea dei Servi), 지오반니 마주오리(Giovanni Mazzuoli, 1360-1426) 등이 있는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볼로냐, 피렌체, 리미니, 파도바, 페루지아 등 지역 이름이 눈에 띈다. 또한 이 중에서도 바르토라노 다 파도바와 안드레아 세르비는 란디니 세대 이후의 작곡가로, 란디니 이전 세대부터 후세대에 이르기까지 스콰루치알루피 필사본이 담고 있는 참여 작곡가들과 그 음악 범위를 짐작하게 해 준다.
스콰루치알루피 필사본은 가로 28.5, 세로 41 cm 비교적 큰 크기로, 14세기 당시 세속 음악 양식이었던 마드리갈, 발라타, 카치아 등의 300곡 이상을 400 페이지 이상의 분량에 수록하고 있다. 종교음악이 아닌 세속 음악으로, 여러 지역의 많은 작곡가들의 음악이 삽화와 함께 화려하게 꾸며진 것은 분명 피렌체 지역의 음악에 대한 열의와 주도, 그리고 당시 피렌체의 문화와 예술을 이끌던 메디치 가문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큰 규모의 필사본은 역사적으로 권력층의 막강한 후원 없이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