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축대를 타고 가지를 뻗어 자라는 담쟁이, 돌멩이 하나, 나무줄기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걷기 좋은 계절입니다. 걷고 싶은 계절입니다.
걸으면서 느리게 느리게 자연이 그려내는 그림을 감상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엘리엇은 그의 시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습니다. 유독 사월은 4.3., 4.16., 4.19. 아픔으로 기억해야 할 날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눈부신, 온갖 꽃들이 지천으로 흐드러진, 나뭇잎들이 영롱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월은 잔인하게 슬프고도 아름다운 달입니다.
내가 사는 동네는 지대가 비교적 높은 곳입니다. 원래 황무지였던 산자락을 다듬어 만들어진 동네라 도로와 상가, 마을을 경계 짓는 축대나 담벼락이 곳곳에 있습니다. 이 축대를 버팀목 삼아 담쟁이와 같은 넝쿨식물이 넓게 뻗어 자랍니다. 마로니에, 느티나무, 은행나무, 벚나무, 플라타너스 등 큼직한 나무들이 차도와 인도를 확연하게 구분 짓습니다. 이 나무들이 사람들이 오가는 길을 감싸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키 큰 나무들 사이로 남천, 철쭉, 금목서 등 중간키의 나무들이 섞여 있어걷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나무가 예쁘지 않은 계절이 없지만 4월의 나무는 그 영롱한 초록빛이 단연 최고입니다. 따뜻하고 밝은 4월의 햇살을 받고 반짝반짝 빛나는 나뭇잎들은 시작하는 청춘의 싱그러움과 닮았습니다. 벚꽃이 지나간 자리에 꽃분홍, 하양, 주홍의 철쭉과 산들 가지 끝에 쌀밥 같은 하얀 꽃이 한들거리는 이팝나무, 일곱 개 나뭇잎 사이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피어오른 마로니에 꽃,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황홀경입니다. 이러하니발걸음이 자꾸자꾸 머뭇머뭇 걷는 건지 멈춘 건지. 목적지가 따로 없어도 이 길을 나오지 않을 수 없는 4월의 날들입니다.
마로니에 하양 꽃
이 길이 좋은 이유, 차들이 많이 지나는 동네의 주요 도로와 나란한 인도지만 큼직큼직 나무들이 완전히 두 세계를 경계지으면서도 또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숲속에 홀로 있는 듯 하면서도 또, 아파트, 정류장, 학교, 교회건물, 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지나치고 사람의 마을이 만들어내는 온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가 잦은 장마철에는 우산을 받쳐들고 이 길을 걷습니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톡톡, 탁탁, 또도독 빗소리에 귀기울이며 걷다보면 이 풍경들과 일체가 된 듯 그저 행복해지곤 했습니다.
순간이다. 지나간다. 순환하지만 또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찰나의 아름다움, 순간의 고유함, 그 순간 마음의 풍경, 순환할 수 없는 나는, 어느 날 이 '특별한 순간'을 꺼내보고 싶어서 사진을 찍고 또 찍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