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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나무 Apr 11. 2024

어느 70대 일본 할머니의 부엌 이야기

출근길이 제법 익숙해졌다. 매일 네비를 켜고 운전을 했는데 오늘은 유튜브 NHK 방송을 틀어놓았다. 귓가에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오는 소리만 담아도 울림이 있는 이야기였다.


 '어느 70대 할머니의 부엌 이야기'이다. 할머니는 3년 전 이곳으로 이사했다. 이전에 이 집에는 90대 할머니가 혼자 사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이곳으로 이사한 이유는 남편이 인지증(치매) 판정을 받았고 남편을 돌보기에는 2층 주택 보다 부엌에서 거실이 보이는 이 집이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이 집으로 이사한 후 온갖 주방 도구와 식기가 가득하고 곳곳에 못이 박혀있는 부엌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전 주인할머니는 부엌에서 부지런히 요리하시며 시간을 보낸 분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동선을 편리하게 하고 효율적으로 요리하기 위한 궁리가 곳곳에 담겨 있음을 느꼈다.


 


처음에는 곳곳에 박여있는 못을 뽑을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부엌을 채우고 있는 가구들, 식기들, 환풍기, 못 등 물건들이 건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일수록 그 쓰임과 필요가 너무나 꼭 알맞아 어느 하나 바꿀 수 없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이 집에 살았던 전 주인할머니가 어떤 분인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매일 부엌에서 요리하면서 전 주인할머니의 삶을 상상하곤 했다. 그리고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전 주인할머니께 편지를 쓰기도 했다. 어느 날 이웃집 아주머니로부터 전 주인할머니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전 주인할머니는 90대로 할아버지가 몇 가지 병을 앓고 있었고 할아버지 병간호와 삼시세끼 손수 할아버지를 위한 요리로 바쁘셨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혹시나 외출을 한 날은 할아버지 밥 준비를 해야 한다며 서둘러 가셨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5년 정도 이곳에서 혼자 사셨다고. 할머니는 전 주인할머니와 자신이 할아버지 병간호를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 주인할머니의 삶은 그렇게 할머니에게 고스란히 다가왔다. 할머니는 날마다 날마다 전 주인할머니의 삶을 되새기며 '나도 당신처럼 날마다 손수 요리하며 남편을 돌볼 수 있기를' 생각한단다.




전 주인할머니의 부엌이, 부엌을 가득 채운 물건들이, 할머니의 삶을 전해주고 70대 할머니는 전 주인할머니의 응원과 지지로 오늘도 성실하게 살 힘을 얻는다.


우리는 이사하면 전에 살던 사람들의 흔적을 지우기 바쁜데, 이런 마음이 참 좋다. 얼굴도 본 적 없고, 이야기를 나눈 적 없지만, 하나의 삶이 다른 삶에게 물건을 통해서 말을 걸고 또 그 말을 끄덕끄덕 호응하며 새롭게 삶을 영위하는 '어느 70대 일본 할머니'의 모습이 가만히 내 마음에 잔잔한 미소가 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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