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때 우리 회사는 영국 Wynyard라는 곳에 생산 공장을 운영했던 시절이 있었다. 2000년경 회사 일로 이 공장에 출장 간 적이 있는데, London에 도착해서 국내선 항공기로 갈아타고 북쪽으로 400여 km 더 이동한 후, 내려서 다시 차를 타고 육로로 1시간 정도를 가야 겨우 도착할 수 있을 만큼 외진 곳에 있던 공장이었다. 꽤 낙후된 오지 지역 개발을 위해서 영국 정부가 매우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우리 회사 공장을 유치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워낙 오지이고 또 원래 거주하던 인구도 적다 보니 당연히 그곳에 한국 식당은 없었는데, 놀랍게도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중국 식당은 그곳에도 있었다. 그런외딴곳에까지 와서 식당을 운영하는 중국인을 보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그 식당에 식사하러 가 보니그식당 주인이 한국인 손님만 오면 깍두기를 반찬으로 내주었는데 맛도 한국에서 먹던 것과 별 차이 없을 만큼 꽤 괜찮아서 좀 의외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Wynyard 공장에 근무하던 한국인 주재원의부인이 10여 명은 되었는데 그녀들이 그 중국집 사장에게 깍두기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 중국인으로서는 그 깍두기가 한국인 고객들을 늘리는데 도움을 주니 좋았고, 한국인들은 맛있는 깍두기를 그 외진 곳에 있는 중국집에서도 먹을 수가 있었으니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던 셈이다.
아울러 덕분에 나처럼 잠시 방문한 출장자도 그토록 오지에 있는 중국집에서 맛있는 깍두기를 먹는 호사까지도 누릴 수 있었던 셈이다. 김치는 없었는데 아마 더 인기 있을김치도 만들고 싶었겠지만 만들기가 너무 복잡하니 그건 포기하고 상대적으로 만들기 편한 깍두기만 만들게 되었던 것 같다.
Wynyard처럼 그렇게 심한 오지에까지 진출한 중국인, 즉 '화교'의 역사는 꽤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상 생활 기반은 한국에 있고 또 한국에서 살지만 국적은 중국이거나 대만인 사람을 한국에서는 화교라고 부른다. 하지만 화교와 유사한 것 같기도 하지만 분명히 다른 그룹이 하나 있는데 좀 생소하지만 바로 화예(華裔)라 부르는 그룹이다. 이들은 한국으로 이미 귀화해 국적은 한국으로 바뀌었지만 부모나 조상은 화교였던 사람들이다.
현지 국적으로 바뀐 화예를 포함한 기준으로 본다면, 중국 화교의 해외 이주 역사는 동남아 같은 경우 이미 1000여 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그렇게 오래전부터 해외로 진출했던 화교들은 거의 전부가 중국의 남쪽 지역인 푸지엔 성(福建省)이나 광둥 성(廣東省) 출신이었다. 과거 해외의 화교들이 표준어보다는 푸지엔 성의 민난어나 광둥성의 광둥어를 모국어로 주로 사용했던 이유도 그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유독 한국의 화교만은 거의 전부가 산둥 성 출신이다. 한국 화교는 조선 말기 1882년 발생한 임오군란(壬午軍亂) 당시 청나라 군사가 조선으로 파병될 때 지원 인력으로 왔던 사람들이 돌아가지 않고 정착하게 된 것에 그 뿌리가 있다 하는데, 그때 왔던 지원 인력들 대부분이 한국과 가장 가까운 산둥성(山東省)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산둥성까지 거리는 불과 400여 Km로 서울-부산 거리 정도밖에 안되니, 가까운 그 산동성에서 지원 인력이 차출되어 한국으로 보내지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화교들은 다른 지역의 화교들과 다르게 민난어나 광둥어가 아닌 중국 표준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중국 북방의언어인 산둥어를 사용했다.
한편, 점차 그 수를 늘려가며 한반도의 상권을 장악해 가던 화교는 한때 남북한 합쳐 10만 명까지 늘어났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이후 오랜 기간 지속된 한국 사회의 화교 배척 풍조와 또한 정부의 의도적인 화교 억압 정책으로 대부분의 화교는 한반도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한국에 살던 화교는 한국과 중국 간 외교관계가 없던 1992년 이전에는 그들의 고향 산둥성이 있는 중국 본토가 아니라 대부분 대만 혹은 미국 등 제3 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한편 한국에 거주하던 화교들이 정치적 문제로 중국 본토가 아닌 대만으로 떠났던 것처럼, 북한에 있던 화교들은 같은 이유로 대만보다는 중국 본토로 대부분 귀환했다고 하는데 마침 그런 북한 출신 화교가 광저우 법인에 근무하고 있어 6개월 광저우 법인 출장 기간 중에 북한 출신 화교를 만나는 경험도 할 수 있었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만 해도 서울에는 화교가 꽤 있었다. 따라서 서울에서 화교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았다. 화교 학교가 있는 연희동이나 명동의 대사관 근처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내가 거주하던 용산의 한국 음식을 파는 식당에서도 한국어와 중국어를 모두 너무 유창하게 구사하는 화교를 본 적도 있다. 하지만 해외에서 한국 출신 화교를 만나게 되는 경우는 쉽지 않았는데, 생애 처음으로 한국 출신도 아닌 북한 출신 화교를 광저우에서 만나보게 된 것이다. 그것도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씩이나....
사실 중국에는 우리 동포인 조선족 인구도 180만여 명이나 될 만큼 많았고 또 그들 중 상당수가 한국어, 중국어모두를 구사할 수있었던 바 중국에 진출한 한국 회사들이 두 가지 언어가 모두 가능하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태어난 화교들을굳이 채용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중국에 근무할 때 실제로도 다른 법인에서는 화교 출신 직원을 본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광저우 법인에는 화교가 두 명이나 근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편 북한 출신 화교를 처음만나보니 그들 역시 남한 출신 화교처럼 한국어가 너무나도 완벽했다. 게다가 자라난 곳이 평안도나 황해도여서 함경도에서 사용되는 것 같은 꽤 강한 북한 사투리 억양도 전혀 없었고 그저 서울 사람들이 잠시 광저우에 놀러 와서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 화교들은 한반도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그런지 일반적인 조선족보다는 훨씬 더 한국어 발음이 부드러웠던 것 같기도 했다.
두 명 중 한 명은 '구'씨 성의 남자였고, 한 명은 여자였는데 여자분의 성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남자 직원의 성 '구'는 한국에 흔한 '具'자는 아니었고, 한국에는 꽤 드문 '丘'자를 사용하는 구 씨였다.
그들이북한을 떠나서 중국으로 돌아온 이유는과거 한때는 남한보다 좋았다는 북한 경제가 1994년 김일성 사후 지속 악화되면서 많은 화교들이 북한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같은 이유로 자신들도 북한을 떠나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북한에서의 성장과정이나 과거 생활에 대해서는 두 사람 모두 좀처럼 말을 피하려 했던 것으로 봐서 실제로는 그런 이유 이외에도 남한에서처럼 북한에서도 화교에 대한 차별이나 냉대가 심해 그들이 북한을 떠나기로 결심할 수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들기도 했다.
나중에 대만 근무할 때 만났던 한국 출신 화교분들도 같은 경우였는데, 꽤 친해지고 나서도 아무리 얘기를 꺼내보려고 시도해도 그들 모두가 일관되게 한국에서의 삶이나 생활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결코 직접 이유를 말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분하고, 차별받고 억울한 기억밖에 없고 그래서 결국 자신이 태어난 그 한국 땅을 떠나 대만에까지 와서 살게 되었는데, 굳이 그 당시의 기억을 그것도 자신을 차별하던 한국인 앞에서 다시 떠올릴 이유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남한에서 뿐 아니라 북한에서도 화교에 대한 탄압과 차별은 심했던 것 같다. 북한에 거주하고 싶으면 북한 국적을 필히 취득하든지 아니면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압박이 끊임없이 지속돼왔고, 1966년에는 정부의 지침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평양의 화교 중학교가 폐쇄되기도 했다 한다. 그런 면에서 남한에서나 북한에서나 화교들이 겪어야만 했었던 경험과 기억은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중국에 살던 우리 한국인들도 유사한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야만 했다. '까오리빵즈(高麗棒子, 고려 몽둥이, 고려 놈이라는 비하의 뜻)'라고 불리며 중국인에게 온갖 수모와 약탈까지 당하고 살아야 했던 아픈 역사가 있었던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1990년대 초반에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가 TV에서 방영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이제는 돌아가신 아버님과 이 드라마를 함께 보고 있는데, 주인공 최재성이 만주에서 중국 마적단에게 끌려 다니면서 죽을 뻔하다 소련군 탱크가 나타나면서 극적으로 탈출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일로 그는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된다.
그런데 옆에서 같이 드라마를 보시던 아버님께서 그 장면을 보시며 갑자기 눈물을 흘리시길래 왜 그러시냐 했더니 저건 허구의 드라마가 아니고 만주의 한국인들이실제로 중국의 마적단에게 그렇게 수도 없이 시달리며 살았다는 것이었다. 어버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일본군으로 징용되어 만주로 끌려가셨다가 일본 군대에서 탈출한 경험이 있는 아버님은 한반도로 돌아오기 전에 잠시 만주에도 체류하셨는데, 그때 아버님께서 직접 보고 겪었던 만주 거주 한국인들의 쓰라린 경험들을 다시 드라마를 통해 보고 있으니, 그 아픈 과거가 기억이 나서 감정을 통제하지못하고 눈물을 흘리셨던 것이다. 사실 만주에는 워낙 짧게 계셔서 중국어를 전혀 못하셨던 아버님이셨지만 유난히 한 단어는 기억하셨는데 바로 '까오리빵즈(高麗棒子)'라는 이단어였다. 한이 맺히도록 들었던 말이기 때문이라 하셨다.
아버님은 6.25 전쟁 발발 이전에 월남을 하셔서 서울에서대학을 다니신 이후에는 줄곳 서울에 사셨지만 고향은 평북 정주이시다. 따라서 나 역시도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원적은 평안북도인데, 요즘은 원적이 그다지 사용하지 않지만 과거 한때는 신분 관련 서류에는 본적과 함께 원적이 꽤 흔하게 사용되던 시절도 있었다.
북한이 아버님 고향이고 나의 원적도 북한이라 그런지 북한 땅에서 태어나고 또 성장한 두 화교에 대해서는 왠지 고향 사람을 만난 것만 같은 느낌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궁금한 북한에서의 삶과 생활도 들을 겸 그들과 자주 식사 자리를 만들곤 했었다. 물론 당연히 술 한잔을곁들인 저녁 식사였다.
그런데 그렇게 같이 식사를 하면서 북한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다 보면, 같은 동양인으로 인상으로는 잘 구분이 안 되는 데다가 그들의 한국어까지도 너무나 완벽하다 보니 때때로 내가 중국 땅에서 중국인들과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기도 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한국인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북한의 뉴스나 방송에서 접하는 특이한 말투는 일부러 과장되게 말을 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평안도나 황해도 말은 서울 표준말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한다.
한편 중국 국적인 그들은 원한다면 언제든지 북한을 방문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들은 북한을 떠난 이후에도 여러 가지 일로 북한을 몇 차례 다시 방문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같은 북한 땅이 고향인 아버님은 평생소원이 고향 땅 근처에라도 한번 가보는 것이었음에도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한국인이 거주하는 한반도 땅을 중국 국적을 가진 화교 출신들은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반면에 정작 한국인은 못 가는 현실이 참 아이러니한 것 같다.
광저우에 근무하는 기간 외로운 객지에서 별로 아는 사람도 없는 실정에서 그들이 함께 있는 덕분에, 같이 식사도 하고 술도 한잔 하는 등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결단코 단 한 번도 내게 노골적으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란 한반도에 대해서는 분명히 부정적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즐겁게 대화하면서도 때로는 순간순간 느낄 수 있었던 기억이 있다.
해외 거주를 위해 이민을 갔던 한국인이 현지 적응을 못해 한국으로 되돌아오는 사례도 종종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이나 캐나다에 이민 갔다가 그렇게 돌아오는 사람들이 그런 결정을 하게 된 이유가 현지의 인종 차별과 이민족에 대한 배타성 때문이었다면 과연 그들이 미국과 캐나다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마찬가지다. 불과 며칠 사이에 수백 명이 학살되고 학살을 피해 만여 명에 달하는 화교들이 압록강을 건너서중국으로도주해야만 했던 평양의 학살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한반도 출신 화교들도 마찬가지로 한국을 잊을 수는 있어도 한국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광저우에서 만난 북한 출신의 화교들도 한국을 잊으려고는 하지만 결코 좋아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중국어는 못해도 '까오리 빵즈'라는 그 말만은 평생 잊지 못하셨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