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과 고려영(高麗營)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3편 Beijing-14)

by SALT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Beijing



14. 베이징과 고려영(高麗營)


베이징시를 구성하고 있는 총 16개의 행정구역 중 하나인 쉰이취(順義區. 顺义区)는 베이징시 북쪽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쉰이취에 베이징의 관문인 쇼우두(首都) 공항이 있다. 그리고 이 공항에서 멀지 않은 거리, 약 10km 정도만 더 북서쪽으로 가면 의외로 우리에게는 매우 익숙한 지명을 가진 지역이 나오는데 바로 '까오리잉', 즉 고려영(高麗營, 高丽营)이라는 이름의 지역이다.


이곳에 이런 이름을 가진 지역이 있다는 것은 매우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다. 내가 다녔던 한인 교회는 당초 시내의 '따샨즈(大山子)'라는 지역에 있었다, 하지만 종교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중국인 건물주가 임대 연장을 거절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훨씬 북쪽 변두리에 위치한 '라이광잉(来广营)'이라는 지역으로 이사를 갈 수밖에 없었다.


요즘은 이 '라이광잉'에도 전철이 들어와서 시 중심에서도 전철을 타고 편하게 다닐 수 있다 하지만, 2005년 당시만 해도 '라이광잉' 지역은 베이징 북쪽의 매우 외진 지역으로 전철도 없었고 택시도 쉽게 잡을 수가 없는 그런 곳이었다.


교회가 '따산즈'에 있을 때는 집에서 약 40~50분의 거리를 걸어 다니거나 때론 택시를 타고 다녔지만, 교회가 이렇게 변두리로 이사 가고 나니 이제는 교통이 너무 불편해 어쩔 수 없이 차를 운전하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고용했던 중국인 기사도 일요일은 쉬는 날이었으므로 결국 내가 직접 길거리 도로표지만을 열심히 읽어가며 운전해서 교회를 찾아가야 했었다. 그렇게 길거리 도로 표지판을 집중해서 보면서 교회를 향해 운전하던 중에 바로 이 '고려영'이라는 지명이 적힌 도로표지판을 우연히 보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고려영'에서 불과 10km 정도 거리에 베이징 공항이 있었고, 베이징 공항에는 출장 등 사유로 거의 한 달에 한번 이상은 방문했으니 어찌 보면 '고려영'이라는 그런 지명을 이전에도 이미 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는 내가 직접 운전하지 않아서 집중을 덜 해서 그런지 그런 지명의 도로 표지판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는데 직접 운전하면서 그때 그 표지판을 처음 보게 되었다.


(도로 표지판에 적혀 있는 '고려영'이라는 지명)

https://j.map.baidu.com/e0/rrw


거리뷰 속의 표지판을 보면 '高丽营北桥(高麗營北橋)'라고 분명히 적혀 있다. 즉, '고려영' 북쪽 다리라는 뜻인데, 이런 도로 표지판의 지명을 보는 순간 뭔가 머리를 탁 치고 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베이징에서 '고려'라는 이름을, 그것도 다른 것도 아닌 지명을 보게 된다는 것이 너무 의외였기 때문이었다. 고구려가 고려라고 불리기도 했으므로 이 지명을 해석하면 '고구려의 군영(軍營)'이라는 의미가 될 수 있는데, 도대체 왜 만리장성의 한참 안쪽 베이징시에 '고구려의 군영'이라 불리는 지명이 있는 것인지?


(고려영 관련 사진)

http://blog.sina.com.cn/s/blog_5a77dc530102x3bm.html




중국 동북지방 역사 왜곡 전략으로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연구 프로젝트가 있다. 바로 이 프로젝트가 중국의 공산당 주도하에 진행되면서, 중국은 만리장성 시작점이 기존 이해와 달리 베이징 근처가 아니라 만주 동북지방이라는 연구결과를 2009년 발표했다.


아울러 3년 후 2012년에는 한술 더 떠 동북지방도 아니고, 한반도 북부의 평양 인근에서부터 만리장성이 시작된다는 2차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그렇게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 홍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만리장성이 평양에서 시작된다는 기사)

https://www.yna.co.kr/view/AKR20180423066000371?input=1195m


과거 동북공정이 진행되기 전에는 베이징에서 멀지 않은 약 200km 정도 거리에 있는 '산하이관(山海关)'이 만리장성 시작점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만리장성은 산하이관에서 시작해서 베이징 바로 위쪽을 지나 중국 서쪽으로 이어지는 장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외적으로부터 국가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는 외적과 자신들과의 경계선인 국경에 성을 쌓지 자기의 영토 깊숙한 안쪽에 그렇게 높고 긴 성벽을 축조할 이유는 없기 때문에, 이 장성이 지나가는 위치는 결국에는 당시의 중국 국경선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고, 따라서 베이징 가까운 지역에서 만리장성이 시작하여 서쪽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그 장성 바깥쪽, 즉 동북 만주지역은 중국 영토가 아니었다는 말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로 이 동북 만주 지역을 터전으로 살았던 만주족, 거란족의 역사뿐 아니라,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등 한민족 국가의 역사까지 중국 동북지역의 역사는 전체가 모두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중국 공산당은 동북 만주 지역이 중국 국경 밖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만리장성이 베이징 근처가 아니라 동북지역 더욱 깊숙한 곳, 즉 만주나 또는 더 나아가 한반도에서 시작된다는 역사의 왜곡 작업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리장성이 한반도에서 시작하는 것으로만 인식시킬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한반도 이북의 만주와 동북 지역은 만리장성 내부의 영토가 되고 자연히 중국의 영토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만리장성이 베이징 근처의 산하이관에서 시작한다는 기존의 학설은 중국 스스로 작성한 명나라의 역사 기록에도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아울러 흉노, 선비, 고조선, 고구려, 발해, 여진, 몽고, 거란 등 한족이 아닌 많은 북방 민족들이 수립한 국가가 장기간 만주지역을 지배해 왔다는 사실 역시 그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이다.


일본의 야욕을 실현하는 한 도구로써 이용당하기도 했지만,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 때문에 일본은 만주족이 건국했던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수반으로 하는 만주국을 그들의 고향인 만주 지역에 수립하여 만주 지역을 중국에서 분리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중국 동북 만주 지역은 중국 한족의 역사와는 꽤나 거리가 있었던 셈이고, 반대로 중국 입장에서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원래는 자신들의 영토가 아니었던 만주 지역을 더더욱 자신들의 역사에 포함시키려는 집요하고 또 철저한 왜곡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 만주뿐만 아니라 현재 중국 영토 내에는 오랜 기간 독립국이었다가 중국에 흡수된 지역들이 적지가 않다. 아래에 보이는 생소한 국기들이 그러한 국가의 국기들인데, 국가와 영토가 중국에 흡수되면서 독립국가의 국민이었던 그들은 이제 중국의 소수민족이라 불리며 중국 국민으로서 을 살아야 하고 당연히 더 이상 자신들의 깃발을 국기로 사용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지역들에 대해서도 역시 동북공정과 유사한 서북공정(西北工程), 서남공정(西北工程) 등의 역사 왜곡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원래 중국 한족의 영토가 아닌 곳에서는 모두 그 지역을 중국 역사로 만들어버리려는 역사 왜곡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1932년 중국에서 독립했던 '만주국'의 국기. 만주족 터전 만주지역에 세워졌던 국가였으나 1945년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중국에 다시 흡수되었다. 한반도처럼 동북공정이라는 역사 왜곡 프로젝트의 대상이 되는 지역이다.


'동 투르키스탄 (East Turkestan)'의 국기. 역사 속에서는 한때 '돌궐'로 불리던 독립 국가로 고구려와 유독 가까워서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양국 간에는 동맹을 맺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만주족의 청나라에 의해 중국이 지배받던 시절 중국으로 흡수되었고, 청이 멸망하자 몇 차례 독립을 시도했지만 1949년 중국에 다시 강제 흡수되었다.


위구르(Uyghur)인이 이 지역의 주요 민족인데, 100만 명 이상의 위구르인이 감금 상태에 있다는 기사도 있을 정도로 중국의 철저한 탄압과 통제를 받고 있는 지역이다.


'동북공정'과도 유사한 '서북공정'이라는 또 다른 역사 왜곡 프로젝트가 역시 이곳에서도 행되고 있다.


한편 위구르인이 터키인과는 혈통적으로 꽤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서 그런지 이 국기는 터키의 국기와 완전히 동일하고 오직 색상만 다르다. (터키 국기는 붉은색)


(위구르인 100만 명 이상 감금되어 있다는 기사)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91113_0000828961&cID=10101&pID=10100


'티베트 (Tibet)' 국기. 과거 '토번(吐蕃)'이라고 불렸던 독립국가였으나 몽고족의 원나라 시절 중국에 흡수되었다. 2차 대전 이후 중국이 혼란스럽던 시절 독립을 회복하기도 했었지만 1950년대 중국이 무력 침공하면서 다시 중국에 흡수되었다.


중국에서는 현재 장족(藏族)이라고 불리는 티베트 민족이 이 지역에 거주했던 원래의 민족인데 이 지역을 대상으로도 '서남공정'이라는 또 다른 역사 왜곡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중국의 티베트 탄압)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7/0000029227?sid=104




현재의 중국을 지배하고 대표하는 민족인 한족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침략 전쟁을 통해 확대해 놓은 광활한 영토 거의 모두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명나라 같은 한족 국가가 오랜 기간 이루지 못했던 숙원을 만주족이 대신 해결해 주고 한족에게 고스란히 넘겨준 후에 자신들은 스스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셈이다.


(청나라의 만주족이 넓혀준 중국 영토)

https://m.fmkorea.com/best/2891781333


결국 만주족 덕분에 중국은 엄청난 영토를 가진 대국이 된 셈인데, 중국 공산당은 그렇게 얻게 된 광활한 영토 중 단 한 지역이라도 분리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티베트나 신장 등 수많은 소수 민족 지역 어느 한 지역이라도 분리 독립에 성공하게 된다면 바로 다른 소수민족 지역 전체로 그 파장이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과거 소련이 해체될 때도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독립국이었던 지역들이 모두 소련 영토에서 분리되어 나간 사례도 있었다.


중국 소수민족은 전체 인구의 10%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티베트, 신장, 내몽고 등등 소수민족의 영토를 모두 합치면 현재 중국 영토의 무려 60%나 된다. 소수민족이 분리되면 중국은 이 60%에 달하는 광대한 영토를 상실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인데, 중국이 현재 영토의 40%밖에 안 되는 면적을 가진 작은 국가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끔찍한 상상을 중국 공산당은 결코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러한 절박성에서 중국의 공산당은 한편으로는 무력 탄압을 통해서 분리 독립 활동을 물리적으로 지속 억압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동북공정, 서북공정, 서남공정 등과 같은 역사 왜곡 작업을 통해 오랜 기간 독립국을 유지하고 살아왔던 소수민족들의 정신과 인식의 근본 뿌리까지 온통 뒤바꾸려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확실한 증빙과 기록이 남아 있어도 과거 역사는 종종 힘 있는 국가들에 의해 왜곡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수많은 외침으로 거의 모든 고대의 역사서가 상실된 한국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같은 역사왜곡 전략에 우선 힘으로 밀리고, 또 역사 기록의 부족에서마저 밀려서 거의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러한 여건에서 만리장성 넘어 베이징시에 뚜렷하게 남아 있는 '고려영'과 같은 역사적 흔적이 각인된 지명은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중국 측에서는 이 지명을 당(唐) 나라 때 당에 의해 멸망한 고구려 유민이나 인질들이 이곳으로 강제 이주되면서 생겨난 지명이라거나 아니면 고려왕조 시절 한반도 상인 등이 이곳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게 되면서 생긴 지명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독립운동가이며 사학자였던 신채호 선생은 이와는 전혀 다른 해석을 했다. 고구려가 당나라와 전쟁하던 그때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어서 베이징 인근 지역으로까지 당나라군을 쫓아왔으며 고려영이란 지명이 남아있는 것은 그때 설치된 고구려 군사 주둔지의 흔적이라고 해석했다.


고려영이라는 지명에 사용되는 '영(營, 营)"이라는 한자는 분명히 군영(軍營)이나 군대의 주둔지를 의미하므로 중국 주장처럼 유민들의 집단 거주지라기보다는 신채호 선생의 이러한 해석이 훨씬 타당성이 높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수(隋) 나라 및 이어서 당(唐) 나라까지 2개의 거대한 중국 통일 왕조가 수십만 때로는 수백만의 대군을 동원해서 모두 6차례나 당시 만주를 지배하고 있던 고구려를 공격했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마지막 7번째에야 겨우 성공해서 고구려는 멸망했다. 그런데 사실 7번째 경우조차 실제로는 고구려에 내분이 발생해서 고구려가 스스로 무너진 셈이고, 만일 내분이 없었다면 그 전쟁의 결과도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강력했던 고구려가 망하기 전, 수·당과의 전쟁에서 무려 6차례나 승리했을 당시, 수나라 혹은 당나라 군사들을 쫓아 만리장성을 절대 넘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실한 보장도 없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 수나라 및 당나라 수도는 베이징이 아니라 그 보다 훨씬 남쪽에 있었고, 베이징은 그저 북쪽 변방의 성중 하나였을 뿐이다. 흉노족, 몽고족, 거란족, 여진족 등 거의 모든 북방 민족이 만리장성을 넘어 변방의 그 성 베이징에 진입한 적이 있는데, 수·당나라와 전쟁을 하면서 6번이나 승리한 고구려만 유독 그 만리장성을 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우리의 선조와 민족의 역사에 대한 너무나도 지나친 겸손이 아닐지....


혼란을 거듭해오'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정리하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가 국가의 전 국력을 기울여 3차례나 고구려를 침공하고도 모두 실패한 것이 수나라 멸망 직접적 원인이었다 한다.


다시 말하면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고구려가 그저 동북지방에 있던 중국의 작은 지방 정부 중 하나가 아니라, 중국 통일왕조 수나라를 멸망시킨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할 만큼 강력한 국가였고, 그런 강력한 국가의 흔적이 만리장성 넘어 베이징에 지금까지도 뚜렷하게 남아 있는 '고려영'이라는 지명에 녹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2014년 2월 한 언론 기사에 의하면,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는 그들이 생존해 있었던 시절에 중국을 방문했던 북한 학자들에게 만주지역의 상당 부분은 역사적으로 한국인들의 영토였다는 것을 시인하는 언급을 했었고, 또 그것이 중국이 공개한 기록에도 분명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50~60년대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발언)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626249.html


적어도 그 당시만 해도 중국의 지도자들은 이후 동북공정을 추진해온 중국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적어도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좀 더 정직하게 받아들여서 고구려나 발해가 중국 역사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였고 또 우리 민족의 국가였다는 것을 인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솔직한 고백을 했던 그 두 사람은 이제 모두 떠났고, 동북공정을 거친 왜곡이 중국을 지배하는 핵심 역사관으로 부상했다. 심지어 시진핑 같은 중국의 현 지도자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 한반도 전체가 역사적으로는 사실상 중국의 일부라는 황당한 주장까지 하기도 했다.


(2017년 시진핑의 발언)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506737&section=sc11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등이 통치했던 우리 조상들의 땅이었던 압록강, 두만강 이북의 광활한 만주 지역을 중국 또는 러시아에 모두 빼앗겨 한반도 좁은 땅으로 밀려나고도 여전히 일본뿐 아니라 중국의 역사왜곡에까지도 당하고만 있는 우리의 현실이 참 답답하다.




그리고 그렇게 답답할 때마다 수나라 및 당나라와의 대군과 싸워 무려 6번이나 승리를 반복했던 고구려와 그 고구려가 만리장성을 넘어서 베이징에까지 적군을 추격해서 그곳에 고려영이라는 군영을 두고 주둔했었을 모습이 더욱 그립다.


'고려영'을 연구했었던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은 해방되기 전 1936년 2월에 여순감옥에서 옥사했다. 그리고 바로 그 해 4월에 그의 유고 중 일부가 '조광(朝光)'이라는 잡지에 게재되었는데 거기에 '고려영' 관련 그분의 시(詩) 한편이 게재되어 있다.


고려영(高麗營) 지나가니, 눈물이 가리워라

나는 서생(書生)이라, 개소문(蓋蘇文)을 그리랴만

가을 풀 욱어진 곳에, 옛 자취를 설워하노라.


신채호 선생이 돌아가신 지 약 70여 년이 경과한 2006년 여름 한국 회사의 베이징 주재원으로 나도 동일한 장소에서 '고려영'이라는 지명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위대한 독립 운동가 신채호 선생님과 비교를 하는 것은 참으로 실례되고 외람된 말이겠지만, 그 지명을 직접 보면서 나 역시 그분이 느끼셨던 것과 조금은 비슷한 아픔과 서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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