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의 한국인 공간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1편 Paris-17)

by SALT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Paris



17. Paris의 한국인 공간


대부분의 해외 대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Paris에도 당시 한인 교회가 몇 군데 있었다. 유명한 샹젤리제 거리의 인근 뒷골목에도 한인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Paris에 체류하는 기간 주일에는 이 교회에서 항상 예배를 보곤 했었다. 단, 매주 주일 빠지지 않고 다니기는 했지만, 그때도 지금처럼 교회에 등록은 하지 않았고 예배만 끝나면 바로 교회에서 빠져나오곤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그 교회를 다니기 몇 개월 정도 되던 어느 날, 그날도 역시 등록하라는 말을 듣기 전에 교회를 빠져나가기 위해, 예배 마지막 기도가 시작될 때 살며시 일어나 뒤쪽의 교회 출입구로 향해 갔다. 하지만 출입구 앞에 도착해 보니 앞에서 기도하시던 목사님이 어느새 그곳까지 이동해 와서 양팔을 벌리고 출입구를 막고 서 있었다.


목사님은 그날만큼은 사전에 단단히 작정을 하셨는지, 꽤 단호한 톤으로 "왜 항상 그렇게 먼저 가시느냐?", "Paris에 언제 오셨느냐?", "새 신자 등록은 왜 안 하시냐?" 등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며 나를 통 내 보내 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마침 기도를 끝낸 신도 다수가 한꺼번에 출입구로 몰려나와서 목사님이 인사하느라 경황이 없게 된 틈에 나는 출입구를 빠져나왔고, 그렇게 그날도 역시 새 신자 등록을 하지 않고 무사히 교회 문밖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야 대부분의 교회에 교인이 매우 많아, 누가 새로 왔는지 목사님이 일일이 신경 쓸 수 없고 알 수도 없겠지만, 해외의 한인교회는 참석 인원이 그리 많지 않아 누가 새로 왔는지 목사가 바로 알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통상 누군가가 교회에 새로 나오면 바로 눈에 띄어 인사도 시키고, 자기소개를 하게 하기도 했는데, 나는 초지일관 모르쇠로 등록도 인사도 하지 않고 교회를 다니다 보니, 종종 "등록하시라", "어떻게 오셨느냐?", "인사하고 지냅시다" 등등의 말을 자주 듣곤 했었다. 하지만 그날처럼 그렇게 완강하게 목사님이 직접 나를 붙잡고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도 역시 탈출에 성공하기는 했는데, 나중에 좀 더 생각해 보니 그 목사님이 그렇게까지 완강하게 나를 붙잡았던 이유가 나를 혹시 자신을 감시하는 정부 기관원 같은 사람으로 인식해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즉, 내 모습이 유학생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또 당시 연수생 신분이었던 바 주재 파견 나와서 매일 출근하는 주재원처럼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짧은 머리에 인상까지도 딱딱했으니 설교 내용을 감시하려고 오는 사람으로 오해했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Paris의 2구 오페라 근처에는 북한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 한국인 식당이 하나 있었는데, 그 식당에 누가 자주 가는지 한국 정보기관에서 항상 파악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어서 오페라 근처 그 한국 식당에는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김치 식당 관련 기사)

1. http://mnews.imaeil.com/Culture/2003082208094747962

2. https://brunch.co.kr/@4f92b1e701454a1/39


물론 이후 중국 베이징 주재 근무 시에는 심지어 북한인이 직접 운영하는 북한 식당까지도 자주 가 본 적이 있지만, 그 당시 90년대만 해도 북한이라면 매우 경계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상황이 좀 많이 달랐다.


그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예배시간 내내 설교를 열심히 경청하다가 설교가 끝나면 다른 사람들과의 아무런 접촉도 없이 항상 바로 사라져 버리니, 그 목사님은 충분히 오해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Paris에는 코리아타운이 형성될 만큼 한국 교민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Paris 이곳저곳에 한국 식당, 한국 식품점, 한국 이발소 등이 있었는데, 비록 그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주재원이나 유학생 또는 여름 한철 Paris를 대거 방문했던 한국인 관광객들을 주 고객으로 영업을 했다.


내가 살던 15구에도 'OO'라는 한국식당이 있었다. 음식이 꽤나 내 입맛에 맞았고, 분위기도 깔끔해 자주 찾아갔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식당과 관련해서는 결코 잊지 못할 두 가지 기억이 있는데, 하나는 6개월간 다녔던 학원의 마지막 수업이 끝난 후 그간 학원에서 나를 가르치던 50대 중반의 여선생님을 초대해 함께 식사를 했던 날의 일이었다.


식사를 하다 보니 의외로 그녀가 한국 음식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이 좀 특이해서 "한국식당을 자주 가느냐?", "어떻게 그렇게 한국음식을 잘 아냐?"등 질문을 했었는데, 그녀가 불쑥 말하기를 자신의 전 남편은 한국인 남자였고 자신은 한국에서도 꽤 오랜 살았으며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과 딸도 있다고 했다.


90년대 그 시절만 해도 국제결혼이 그처럼 흔하던 시절이 아니었고 또 지난 반년여 간의 수업과정에서도 그녀가 그런 내색을 보였던 적은 전혀 없어 나는 그 말을 듣고 적지 않게 놀랐는데, 오랜만에 한국인과 한국식당에서 식사하다 보니 오래전 기억들이 새삼 많이 떠올랐는지 그녀는 한옥집에서 살았던 얘기, 한복 그리고 김치와 김 등 한국 관련 과거의 기억에 대해 꽤 많은 얘기를 했다.


그녀가 한국인 남편과 헤어진 배경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에 대해 직접 묻지 않았지만 대화중 간혹 흘러나오는 얘기들을 통해 추정해 보면 아마도 남편보다는 남편 가족들과의 불화가 이혼의 가장 큰 이유처럼 들렸다.


한편 한국에 거주했던 경험이 있었으니 한국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기도 하겠지만, 결국에는 이혼으로 결말이 나버린 그 한국에서의 생활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그동안 수업 시간 중, 때로는 거짓말이나 심한 과장까지 보태서 내가 한국을 과도하게 포장하고 자랑하곤 했을 때 그 말을 듣는 그녀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민망하기도 했다.


좀 많이 끔찍한 얘기지만 'OO'식당 관련 또 하나의 기억은 살인 사건이다. 식당의 주방에서 일을 하던 한국인 여성이 살해되어 센 강에서 목이 없는 상태의 시체로 발견된 그런 사건이었는데, 더 충격적인 것은 그녀를 그렇게 참혹하게 살해하고 센 강에 버린 범인은 바로 그 여인의 아들이었다. 당시 현지 신문이나 교민신문에도 이 참혹한 사건과 관련된 기사가 많이 나왔었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돼서 그런지 지금 다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아래 링크 단 한 건만 찾을 수 있었다. 이 사건 이후 그 식당은 바로 문을 닫았다.


(친모 살해 후 센 강 투신, 아래 링크 중간 부분)

http://www.dongpo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686


내가 Paris에서 가장 자주 찾아갔던 한국식당이 집에서도 멀지 않은 바로 식당이었으니, 나도 분명 그 여자가 해준 음식을 여러 번 먹었을 것인데, 목이 잘린 상태로 센 강에서 발견된 그녀의 손과 팔로 그간 그 식당에서 내가 먹곤 했던 음식들이 조리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좀 하기도 했다.


왜, 그것도 그 먼 Paris에까지 와서 혈육 간에 그러한 일이 발생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역만리 타향에까지 와서 그 좁은 식당 주방에서 땀 흘려가며 살기 위해 노력했던 한 생명이 그렇게 허망하고 비참하게 사라지는 것이 참 허무한 것 같다.




한국음식 특히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같은 것들을 먹은 이후 한여름에 Paris에서 전철 타면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진다.


식사 후 아무리 이를 닦아도 (나는 항상 칫솔을 갖고 다니며 식사 후마다 바로 이를 닦아 별명이 미스터 칫솔, 즉 불어로 monsieur brosse à dents이었다), 입으로는 물론 몸과 옷을 통해서 먹었던 찌개 등 한국음식의 그 독특한 냄새는 모락모락 주변으로 전파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냄새 때문에 전철을 타면 내가 서 있는 자리 옆에는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것은 물론 이미 옆에 있던 사람들도 슬금슬금 먼 곳으로 피해서 가는 경우를 경험하기도 했던 것이었다.


특히 더운 여름에 환기도 잘 안 되는 Paris의 낡은 지하철 밀폐된 공간에서 땀냄새와, 김치, 마늘, 된장이 온통 뒤섞인 냄새가 나면 그 냄새에 익숙하지 않은 프랑스인들은 정말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독한 냄새의 음식이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두부를 발효시킨 음식 취두부(臭豆腐)나, 프랑스의 발 고린내 나는 듯한 독한 치즈도 그 냄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다.


Paris에 살면서 장을 볼 때는 샹삐용(Champion)이라는 집 근처의 마트를 가곤 했는데, 장 보러 갈 때마다 치즈들이 진열된 구간은 피해서 저 멀리 돌아다녔다. 장마철 한 여름 한 열흘 신은 양말을 물에 담갔다가 꺼내서, 다시 열흘 정도 그늘에 두면 날 것 같은 그런 역겨운 냄새가 나서 도저히 그 근처로는 지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나중에는 나 역시 그런 치즈를 즐겨 먹기는 했지만 어쨌든 초기에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자주 가던 식당은 아니지만, 깡브론느(Cambronne) 근처 한국식당에서 당시 한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박모라는 정치인을 우연히 만난 적도 있었다.


당내 경선이었는지 최종 경선이었는지, 명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쨌든 낙선을 한 정치인이었는데, 낙선이 확정되고 기분전환도 할 겸 부인과 함께 Paris 여행을 온 모양이었다.


그는 손님도 몇 안 되는 작고 허름한 그 식당에 들어와서는 우리를 보자마자 한국의 민주주의가 걱정된다고 먼저 말을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시절 여야 관계없이 정치인들에게는 일종의 알레르기를 같은 것을 갖고 있어서 그 말에 별다른 호응을 해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많이 지쳐 보였고 또 외로워 보여, 정치인도 결국은 우리와 같은 약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그때 들었던 기억이 있다. 대통령까지 꿈꾸던 국회의원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그날이 내 인생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프랑스 한식당의 역사)

http://www.okja.org/europe_dong/113859




당시 한국인이 운영하는 미장원도 Paris에 있었는데 나는 아무래도 대화하기가 편해서 1년 내내 그곳에서만 이발을 했고, 프랑스인이 운영하는 이발소는 프랑스 거주 기간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이 미장원에 가면 정말 반가운 것이 있었는데 바로 한국의 잡지와 만화책이 여러 권 있다는 것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보라고 미장원에서 구비해둔 것인데, 때로는 이발 보다 그 잡지 보는 재미에라도 그 이발소를 찾게 되는 것 같았다.


이 이발소에서는 꽤 특이한 모습을 보기도 했는데, 어쩌다 프랑스인 손님이 들어오면 손님이나 주인이나 자연스럽게 먼저 머리를 감는 것이었다. 한국인 경우 이발을 마친 후에 머리를 감는 것과 완전 반대 순서였는데, 주인에게 나중에 이유를 물어보니 프랑스인들은 모발이 약해서인지 아니면 귀찮아서인지 어쨌든 한국인처럼 매일 머리를 감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기름진 머리가 많아 그 상태로는 이발이 힘들어 어쩔 수 없이 먼저 머리를 감는 것이라 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업소 중 특이한 곳도 있었는데 바로 '라 파리지엔느(La Parisienne)'라는 한국식 룸살롱이었다. 그런데 룸살롱이라는 것도 꽤 특이했지만, 주인 역시 매우 특이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한국인으로 프랑스의 외인부대 (Légion étrangère)에서 군 복무를 했던 사람이었다.


흰색의 께삐블랑(Képi Blanc)이라는 군모로도 유명하며, 영화에서도 자주 소재로 다루어지는 외인부대의 군인들은 계약된 복무 기간을 무사히 마치면 프랑스 국적을 부여받는 특혜가 주어졌었다. 그러한 특혜 때문에 제3세계 등 가난한 나라 청년들이 많이 입대했다 하는데, 그 사장님도 그렇게 입대하여 무사히 제대한 후 프랑스 국적을 얻어 Paris에서 한국식 룸살롱을 개점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회사의 프랑스 법인에서 연수생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한 후 그곳에서 뒤풀이를 한 적이 있어 그 덕에 나도 소문만 듣던 그 유명한 '라 파리지엔느'라는 그 룸살롱에 한 번 가 보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간 김에 외인부대까지 갔다 온 그 사장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었지만, 마침 그날은 자리에 없어 볼 수 없었다.


대신 그 단란주점에 근무하는 다양한 국적의 종업원들은 볼 수 있었는데, 한국인은 별로 없었던 반면, 일본인이나 동구 여인 등은 꽤 있었다. 그 당시 Paris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업소 중에서는 꽤나 특이하고 유명한 명소 같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후 문을 닫았다고 들었다.




한국음식은 식당에서만 먹은 것은 아니고, 당연히 집에서도 해 먹었다. 물론 집에서 한국 음식을 해 먹기 위해서는 한국 식품점에서 재료를 사 와야 했는데, Paris에는 비록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한국식품점도 이곳저곳에 몇 개 있었다.


쌀처럼 무거운 식재료를 사는 날은 차를 갖고 가서 운반을 했는데, 주차 공간이 부족한 Paris에서 대부분의 작은 한국 식품점들이 위치한 Paris 뒷골목에 주차할 마땅한 장소를 찾는 것이 항상 매우 어려운 과제 중 하나였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차를 갖고 갔음에도 주차할 자리를 찾지 못해 결국 1~2km나 떨어진 먼 곳에 간신히 주차를 하고 식품점까지 다시 걸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날은 차를 가지고 갔음에도 쌀 같은 무거운 식재료를 손에 들고 식품점에서 차까지 몇 km의 거리를 진땀을 빼가며 고생스럽게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는 다행히 차가 있어서 차가 없는 어려운 유학생 후배들보다는 처지가 좋아서 내 차로 후배들의 이삿짐 등 물건을 날라준 경우도 있었고, 쌀 보다 훨씬 더 무겁지만 Paris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생수를 몇 다발씩 사서 집으로 배달해주는 착한(?) 도 가끔은 했다.


김치는 수원에 있는 모 대학을 나온 사람이 운영하는 한국 식품점에서 항상 구매했는데, 그 김치는 양념도 별로 없고 사실 결코 맛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김치가 워낙에 귀한 Paris의 현실에서 그나마 그 김치는 내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귀중한 필수품 중 하나였다.


그 식품점 사장님은 불어를 전공한 사람으로 나보다 2~3년 젊은 사람이었는데, 나중에는 꽤 친해져서 가끔 술도 한잔 같이 하며, 이런저런 세상 얘기도 나누곤 했었다.


그 사장한테 들은 얘기인데, Paris에는 교민이 별로 없어서 한국음식 재료는 대부분 한국 교민이 많은 독일에서 가지고 온다고 했다. 아시겠지만 독일은 1960년대부터 한국에서 간호사나 광부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갔던 것이고, 그들 중 상당수가 독일에 계속 남아 있어 프랑스보다는 한인 사회 규모가 훨씬 크다고 했다.


단, 김치는 독일에서 사 오지 않고 그 젊은 사장님이 배추를 사서 직접 만든다 했는데, 김치 만드는 일이 적지 않게 힘든 일이라 김치 만드는 날은 소주를 몇 병 집에 가지고 가서 그 소주를 마시며 몇 시간 동안 김치를 만든다고 했다.


혼자 사는 총각이 김치 만드는 것이 힘들고 지루해 그렇게 술 한잔 하면서 만들었다는데, 그 뒤로는 그 식품점에서 사 온 김치를 먹을 때마다 소주로 약간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김치를 만들었을 그 친구 모습이 그려지곤 했었다.


그 식품점에서 김치를 몇 통씩 사서 집에 올 때는, 당분간은 김치 떨어지지 않고 밥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집으로 오는 길 내내 마음까지 너무 뿌듯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사소한 김치가 삶의 행복 척도 중 하나였던 시절이었던 셈이다....




한 번은 프랑스 중부 도시 비쉬(Vichy)에서 역시 연수하던 몸무게 110kg 정도 되는 회사 후배가 Paris 구경 온 김에 내 집에 와서 라면을 함께 끓여 먹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후배가 라면보다는 몇 십배나 더 비싼 그 김치를 한국에서 먹듯이 우적우적 순식간에 다 먹어 치우는데, 그 광경을 보면서 말은 제대로 못 했지만 과장을 좀 보태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아마 좀 살살 먹으라고 몇 마디 했던 것 같다.


그 후배와는 요즘도 가끔 만나 당구도 치고 또 식사도 같이 하는데, 그렇게 만나면 수 십 년 전의 그때 내 집에서 먹었던 그 김치 이야기가 여전히 좋은 안주감으로 활용되고 있다. 나는 그 귀한 김치를 개념 없이 무지막지하게 다 먹었다고 후배를 비난하고, 그 후배는 김치 구경도 할 수 없는 프랑스 시골에서 올라온 후배가 그깟 김치 좀 많이 먹었다고 그런 구박했느냐 뭐 이런 식이다....


그 친구나 나나, 30대 초반 또는 중반 파릇파릇하던 시절 그렇게 지구 반대편 Paris에서 만나 함께 라면도 끓여 먹고 요즘은많이 줘도 별로 먹지 않을 것 같은 그 흔한 김치로 신경전도 펼치고 그랬는데, 이제는 둘 다 퇴직하고 흰머리 희끗희끗한 나이가 되어 오래전 Paris에서의 과거 얘기 중 하나로 그 김치 사건을 회상하고 있으니 흘러가는 세월이 새삼 참 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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