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장밋빛 인생 (라비앙로즈)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1편 Paris-15)

by SALT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Paris



15. 실패한 장밋빛 인생 (라비앙로즈)


프랑스의 전설적 가수 Edith Piaf(에디뜨 삐아프)가 부른 노래 중, 한국어로 '장밋빛 인생'이라고 번역되는 La vie en rose(라비앙호즈)라는 노래가 있다. 사랑에 깊이 빠진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삶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노래다


Paris에 체류하면서 학원 다니는 동안에도, 어학원의 남녀 학생 간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하는 것을 적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낭만의 도시 Paris에 살고 있어서 더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객지에 홀로 떨어져 있으니 외로운 남녀가 자연스럽게 서로 의지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이성을 찾아가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남녀 간 사귐에 있어 좀 특이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바로 국가 간 관계가 별로 좋지 않기로 유명한 한국 남학생과 일본 여학생의 사귐이 의외로 꽤 많았다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Paris에서 한일 남녀 간 사귐이 흔한 현상도 참 특이한데, 중남미로 연수 갔다 온 동료들의 말에 의하면 중남미에서도 그런 현상이 유독 많았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중남미에서도 Paris에서처럼 대부분의 경우 일본 여학생이 적극적으로 한국 남학생에게 접근해 사귐이 시작되었다는 것도 동일한 현상이었다.


일본 여학생들 말은, 한국 남자에게는 일본 남자에게 없는 남성미가 있어 그 부분에 끌린다고 했다는데 일본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한국 남자 배우를 보면 그리 남성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아 그 말이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유를 떠나 '한국 남학생 + 일본 여학생' 조합이 꽤 흔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는데, 어쨌든 국적을 불문하고 일생 한번 방문해 보기도 어려울 수 있는 낭만의 도시 Paris 거주 기간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하나의 큰 축복이고 인생을 살면서 쉽게 가져 볼 수 없는 기쁨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나 역시도 비록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Paris 체류기간 나름 아름다운 사랑, 즉 '라비앙로즈'를 꿈꾸었던 적이 몇 차례 있었다.


Paris에 도착해서 집을 구하기 전에 몇 주간은 시내의 작은 호텔에서 묵었는데, 그 호텔 리셉션 직원 중에 미모의 젊은 프랑스 여자 직원이 있었다. 외국어를 배우는 데 있어서는 현지의 이성 친구와 연애를 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선배들의 진심 어린 조언(?)도 있고 해서, 같이 갔던 연수 동료들과 함께 용감하게 그녀에게 접근해, 우리들은 불어를 배우러 프랑스에 왔는데 학습비를 지불할 터이니 우리에게 혹 불어를 가르쳐 줄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미혼의 총각이었다).


나름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며 우리 모두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답에 초조하게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우리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그러한 접근을 한두 번 경험한 것이 아니라는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곧바로 답하기를 자기 남자 애인도 불어를 매우 잘하는데, 그 남자 소개해 줄 테니 그 남자 애인에게 배우면 어떻겠냐고 했다.


우리는 물론 더 이상은 아무런 말도 못 했다....




내가 다니던 왜로쌍트르 어학원에는 스위스에서 온 학생이 유독 많았었는데,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많은 남학생들의 눈길을 끌었던 미모의 20대 초반 금발의 여학생이 있었다.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는 못했지만, 나 역시도 오다가다 마주치는 그녀의 미모를 잊지 않고 있었는데, 하루는 내가 학원 도서관 외진 구석에 앉아 숙제를 하는데 뭔가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고 봤더니, 바로 그 여학생이 내 앞에 서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미소를 짓고 뭔가를 말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절호의 기회에 순간적으로 너무나 놀랐던 나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다시 푹 숙이고, 열심히 숙제를 하는 척했다. 그러다 잠시 후 번뜩 정신이 들어 이런 황금 같은 기회를 바보 같이 왜 놓치냐는 생각이 들었고 곧바로 다시 고개를 들고 그녀를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미모로는 당시 그 학원 여학생 중 결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그녀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나처럼 체격도 작은 별 볼일 없는 동양인에게 접근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동양인과 사귀면 어떤 지 하는 호기심에서 그랬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은데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어쨌든 그 여학생이 분명히 의도적으로 내게 기회를 준 것이었는데, 나는 그 절호의 기회를 그대로 놓쳐버렸다.


놓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혀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그녀를 무시하듯이 오히려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 남자에게 먼저 미소를 보냈던 그녀로서는 얼마나 불쾌하고 자존심 상했겠는가, 이후 학원에서 오가며 우연히 마주쳤을 때 간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다시 바라보곤 했지만, 그녀의 반응은 이미 나를 투명인간 대하듯 너무도 쌀쌀하게 변해 있었고, 당연히 두 번 다시 그녀가 미소를 내게 보내는 그런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쏘르본느(Sorbonne) 대학의 어학과정 다닐 때에도, 같은 반에 미모의 일본 여학생이 있었다. 이번에는 좀 더 용기를 내서 그녀에게 접근해, 말을 거는 데 성공했고 뭐 썩 가까운 친구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녀와는 그럭저럭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


하루는 그 여학생이 자신의 집에서 간단한 파티를 하는데, 친구 몇 명을 초대했으니 나도 오라고 해서 너무나도 기쁜 마음에 동의하고 정해진 날에 그녀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방문해서 보니 초대받은 여러 친구들 중, 마치 집주인처럼 행동하는 일본인 남자가 한 명 있어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그 일본 여학생과 그 집에서 같이 동거하는 남자였다.


뭐 당시 유럽에서는 남녀 간 동거를 해도 연인 사이가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그 일본인 남녀는 그런 경우로는 보이지 않았고 명백히 연인으로 보였다.


동거하는 남자가 이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내게는 충격이었지만,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분명히 눈치채고 있었을 텐데 그런 나를 굳이 동거남과 함께 사는 집에까지 초대한 그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럼에도 억지로 표정 관리해가며 간신히 그 파티에 끝까지 참석하고 집에 돌아오기는 했는데, 집에 돌아와서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그 상황이 너무 황당했고, 아무것도 모르고 나름 큰 기대를 하고 그녀 집에 찾아갔던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24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날의 일은 미스터리다, 도대체 그녀가 왜 나를 동거남과 함께 사는 바로 그 집으로 초대했는지.... 정말 내가 중성적 친구로서만 느껴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동거하는 남자가 있으니 정신 차리란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그런데 만일 후자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잔인한 방식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었을지....




방학 동안 Paris로 어학연수 온 한국인 여대생들도 있었다. 서울 모 유명대학 학생들이었는데, 우연히 알게 되어 같이 관광도 다니고 그랬다. 여대생들이 예쁘기도 했지만, 내가 객지에서 홀로 오래 살다 보니 많이 외로워서 더 그랬는지, 그녀들 중 한 명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호감을 사기 위해 다양한 호의를 베풀기도 했었다.


한편 그렇게 그녀들과의 만남이 늘어나면서, 상대방도 점점 나를 이성으로 느끼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그건 나만의 완전한 착각이었고 그녀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학원 같은 반에 있던 Torsten이라는 독일인 남자 친구와 만날 때 그녀들도 같이 초대해서 함께 식사한 적이 있는데, 그 식사 이후 내가 좋아했던 그녀는 그 독일인 Torsten에게 빠져 그에게 적극적으로 애정 공세를 하는 모습을 서슴없이 내 비추곤 했었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을 알던 Torsten은 입장이 곤란해 나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꽤나 당황스러운 모습을 보였지만, 나와는 연인 관계도 아니었던 그 여학생이 다른 남자가 좋다는데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은 전혀 아니었다.


방학이 끝나면서 그 여대생들은 한국으로 돌아갔는데, 그 뒤에도 Torsten과는 Paris에서 자주 만났지만 Torsten과 그녀와의 관계가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나는 묻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가장 오래 만났었고 가장 좋아했던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한국 교민 2세였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돼서, 불어 회화도 배울 겸 정기적으로 만나 그녀에게 불어를 배우곤 했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배우는 불어는 문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회화를 배우는 것이어서 회화 소재를 찾아 여기저기 Paris 시내 명소를 같이 돌아다니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고는 했었는데, 내게는 그녀와 같이 다니는 그런 여행이 일종의 데이트 코스를 밟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녀는 한국으로 말하면 전문대 개념의 학교 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이미 30이 넘은 나와는 나이차도 많았지만 사실 키도 유난히 작았으며, 생각해 보면 그렇게 예쁜 인상도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당시 그녀에게 빠져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그녀와는 내가 한국으로 귀국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안 만나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왜 갑자기 그녀와의 만남이 중단됐는지 이제는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그녀가 당신과 나는 불어 선생과 학생 사이 이상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뭐 이러한 말을 하지 않았나 싶고, 내가 그런 말에 충격받거나 삐쳐서 소원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호텔 리셉션의 아가씨는 애당초 가능성이 없었던 것 같고, 인기 많은 스위스 여학생은 그 여학생이 베푼 귀한 기회를 내가 스스로 발로 차 버렸으니 할 말이 전혀 없고, 동거하는 남자가 있는데 굳이 집으로 나를 초대한 그 일본 여학생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이해가 안 되고, 한국인 여대생과 교민 2세는 나 혼자 열심히 헛물만 켜다가 끝난 것 같고....


아름다운 Paris에서의 아깝고 귀한 1년의 시간 동안 펼쳐진 나의 나름 치열한 '장밋빛 인생' 시도는 이렇게 거듭 헛물만 켜다 결국 허망하게 끝났다.


낭만과 사랑이 흠뻑 넘쳐나는 Paris에서조차도 아무에게나 '장밋빛 인생'이 허용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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