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수출 업무를 담당하고 또 해외 주재 근무까지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외국인과 만날 기회가 있었고 그러다 보니 그중에는 꽤 가까운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비즈니스 연장선 상에서만 만났던 사람들로 꽤 가까운 것 같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개인적으로 친구처럼 사귀는 관계로 발전하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비즈니스 관계가 아니라 어학원처럼 동일한 입장과 처지에서 시간을 보내며 만나게 된 사람들은 개인적으로도 가까운 친구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바로 Paris에서 어학 연수할 때 동일한 학생 신분으로 같이 불어 수업을 받으며 만났던 외국인 학생들이 그랬다.
물론 비록 프랑스 Paris에서 연수를 받고 있었지만 당시에 그렇게 가까워졌던 친구들은프랑스인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모두 나처럼 프랑스에서는 이방인 신세였던 사람들이었다. 프랑스인들이야 당연히 Paris의 어학원에서 불어를 배울 리가 없으니 모두 나처럼 불어를 배우러 Paris에 온 외국인 학생들이었던 것이다.
결국 좀 아이러니하지만 프랑스라는 이방의 땅에서 또 다른 이방인 친구들과 가깝게 사귀게 되었던 것이다....
Stephan, Margaret, Torsten 등 세 명의 가까운 친구가 있었는데, 나이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Margaret은 나보다 한 1~2살 어렸던 것 같고, Torsten, Stephan은 10살 이상 더 어려서 20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Margaret과 Torsten은 독일인이었고, Stephan은 스위스인이었다.
Stephan은 좀 특이하지만 실직 상태에 있던 친구로실직 수당으로 Paris에서 불어를 배우고 있는 학생이었다. 물론 스위스에도 불어 사용 지역이 있어, 스위스 안에서 불어를 배울 수도 있었지만 스위스 물가가 워낙 높다 보니 Paris에 와서 불어를 배우기로 했던 것이었다.
Paris의 물가도 역시 결코 낮은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스위스보다는 낮아서 생활비가 적게 들어가고, 또 불어라면 그 상징적 도시가 Paris이다 보니 스위스의 불어권에 가서 불어를 배우기보다는 Paris를 택했던것이다.
불어를 배우려는 이유는 독일어 외에 불어까지도 구사할 수 있다는 자격증이 있으면 취업에 좀 더 유리하고 급여도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 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스위스는 다언어 사용 국가로 독일어, 프랑스어, 이태리어가 사용되는 지역이 있는데, 독일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60%가 넘어 가장 많기는 하지만, 불어를 사용하는 인구도 스위스 서부지역 중심으로 약 20% 정도 된다 하니 결코 적은 비중은 아니었다.
Stephan의 고향 스위스는 화폐가치와 물가가 같이 높기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Stephan의 말에 의하면 Paris에서는 그가 받는 스위스 실업수당만으로도 비싼 학원에 다니면서 생활비도 충당할 수 있었지만, 같은 금액으로 스위스에서는 그런 생활은 엄두도 낼 수 없다고 했다. 인당 소득이 아무리 높고 화폐가치까지 높아도 그 나라의 물가도 그만큼 높으면 그 높은 인당 소득도 실질적으로 크게 의미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문제들 때문에 절대적 소득보다는, 그 나라 물가 수준에 연동해서 소득을 평가하는 구매력 기준 소득(PPP, Purchasing Power Parity) 측정법이 탄생한 것 같은데, 실제로 Stephan 얘기를 들어보면 스위스의농촌마을에서 살았다는 그의 생활수준은 우리나라 여느 중상층 농촌가정 수준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Stephan에게 들은 얘기 중에 좀 충격적인 것도 있었는데,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바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동성애자가 아니지만 그런 곳에서 일하면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 팁을 두둑하게 주기도 해서 돈 벌러 그런 바에 다녔다는데,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 당시 유럽인의 사고방식이 나의 방식과는 꽤 많이 다르다는 것을 실제 체험하기도 했다.
Stephan과는 같은 반의 독일인 여학생과 함께 Paris에서 멀지 않은 Fontainebleau 같은 유명한 프랑스의 고성들을 내 차로 함께 당일치기로 구경 다니기도 했었다.
그런데 사실은 나는 독일 여학생에게 호감이 있어서 같이 구경 가자고 했던 것인데 단둘이 가자고 하면 그녀가 선뜻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 Stephan까지도 끼워서 그녀에게 제안을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몇 번 세 명이 함께 고성 여행을 다니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그녀와 내가 가까워진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Stephan과 그녀가 가까워지는 황당하고 씁쓸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Stephan도 그녀에 대한 내 연정을 익히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녀가 워낙 Stephan에게 적극적이어서 어쩔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Margaret은 '자세교정 치료사(Orthotherapy)'라는 좀 특이한 직업을 갖고 있던 독일 여자였다.
그녀는 '자세교정 치료'라는 것을 마사지와 혼동하는 것을 꽤나 싫어했는데 좀 다혈질이기도 했던 그녀는 같은 반의 친구들이 농담조로 결국 마사지 아니냐고 말하면 발끈하던 모습을 보이곤 했던 기억도 있다.
수업이 끝나면 그녀와 함께 둘이서 가끔 시내 구경도 하고, 맥주도 마시곤 했었다. 그렇지만 연애를 하던 사이는 결코 아니었다. 그녀가 내게 친구로서의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은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마르긴 했지만 키도 나보다 컸고 성격도 꽤 직설적이라 다소 남자 같은 느낌의 친구였던 것 같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결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던 일인데, Paris 어학원에서 하나의 수업이 끝나면 또 다른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간혹 과거 학창 시절 그랬던 것처럼 내가 나가서 칠판을 닦곤 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잦아지다 보니 한 번은 10대 터키계 독일 여학생이 "수업 끝났으니, 또 네가 나가서 닦아라!"라고 내게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좀 놀리는 것 같기도 했고 또 명령조로 말하는 것 같아서 순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후 이 애매한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순간에 갑자기 Margaret이 얼굴이시뻘게져서 소리를 버럭 지르며 그 여학생에게 "네가 뭔데 그런 얘기를 하느냐, 닦으려면 네가 나가서 닦아라!"라고 버럭 화를 내는 것이었다.
워낙 큰 키의 마가렛이 평소와는 전혀 다른 매우 공격적인 표정으로, 그것도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니 그 어린 터키계 독일 여학생은 주눅이 들어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조용히 앉아 있었고, 나를 포함 교실에 있던 나머지 다른 학생들도 Margaret 눈치만 봐야 하는 그런 상황이 잠시 이어졌다.
어쨌든 그날 Margaret이 내 순간적인 고민을 그것도 매우 화끈하게 대신 해결해줘 참 고맙기는 했지만, 너무도 화를 크게 내서 사실 그때 좀 의외였고 많이 놀라기도 했었다.
한편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2차 대전 이후에 매우 많은 터키인들이 독일로 이주를 해서 현재는 독일 땅에 거주하는 외국인 중 터키인이 무려 320만 명으로 가장 많다고 한다. 그런데 이처럼 특정 이민족의 수가 너무도 많으니 터키인에 대한 독일인의 감정이 비교적 좋지 않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칠판 사건 정도는 결코 아니지만 Margaret이 내게도 화를 낸 적이 있었다. 맥주를 마시고 그날도 역시 내가 계산한다 했더니, 각자 지불해야지 왜 너만 계속 계산하려 하느냐고 내게 핀잔을 준 것이었다.
나는 내가 나이가 더 많고 또 남자이니 1995년 당시 한국의 보편적 관행대로 내가 돈을 내는 것이 매우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던 것인데, 독일 문화에서 교육받고 성장한 그녀에게 매번 반복되는 나의 그러한 행동은 꽤나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한국으로 귀국한 후 그녀로부터 그녀의 아름다운 독일 고향 마을이 그려진 엽서를 받았던 것까지는 기억이 남아있는데 그것을 마지막으로 이후 안타깝게도 연락이 끊겼다.
Torsten은 독일인이지만, 태어나기는 독일의 동쪽 폴란드 국경 넘어 러시아 영토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에서 태어났다. 발틱 3국의 독립으로 러시아 본토에서 분리되게 된 칼리닌그라드는 현재는 러시아 영토지만, 과거 한때는 독일 영토로 독일의 전신 동프로이센의 핵심 도시였으며, 당시에는 독일어로 '쾨니히스베르그(Königsberg)'라고 불렸던 도시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너무도 유명한 독일 철학자 임마뉴엘 칸트(Immanuel Kant)도 바로 이곳에서 태어나고 활동했다 한다.
하지만, 중세이래 여러 차례의 전쟁을 통해, 이 동프로이센 및 인근 지역 주인이 뒤바뀌는 역사가 반복되다가마침내 이 땅은 최종적으로 러시아의 영토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렇게 영토의 주인이 뒤바뀌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독일인들이 독일 본토에서 분리된채 갑자기 러시아 땅에서 살게 되었고, Torsten의조상도역시 그러한 과정을 통해 러시아의 영토에거주하는 러시아인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배경에서 원래 독일인이었던 Torsten도 태어날 때는 러시아인으로 태어나게되었다.
하지만 당시 Torsten을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독일 경우, 그렇게 전쟁과 국토 상실 등을 통해 자의와 관계없이 어쩔 수 없이 해외에 거주하게 된 독일인과 그 후손에 대해서는 독일 정부 차원에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들의 독일 국적 회복 정책에도 꽤 적극적이었다고 했다.
부모님 세대부터 오랜 기간 러시아에서 살았고, 러시아에서 태어난 Torsten 또한, 그런 독일 정부의 정책 덕분에 결국 독일로 이주해서 다시 독일인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독일의 이런 정책은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에 대한 정책도 그렇지만, 러시아나 인근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또 다른 우리 동포, 고려인에 대해 한국 정부가 취하는 정책과는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어보인다. 독일의 이러한 정책은 국가가 국가의 잘못으로 인해 야기된 국민의 문제를 국가가 책임지는 개념으로 한국의 현실에서도 나름 꽤 큰 시사점이 있는 정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스위스인 Stephan이 유들유들하고 주관이 별로 뚜렷하지 않았던 반면, Torsten은 꽤나 고집도 있었던 친구였는데, 그러다 보니 Torsten과는 종종 특정 화제에 대해 좀 끈질긴 논쟁을 하기도 했었다.
기억하는 논쟁 중 하나가 동양 특히 한국에서 연장자에게는 무조건 존칭을 사용하고 존경의 예를 갖춰야 한다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
Torsten의 논리는, 나이가 많다고 반드시 정신적으로 더 성숙하거나 인성이 풍부한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에 나이를 기준으로 존칭을 사용하고, 존경을 표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인품과 인성에 따라 존경 여부가 결정돼야 하는 데, 인품과 인성은 나이보다 개인의 성품과 노력에 따라 얻어지는 결과라는 것이었다.
그의 그러한 주장을 들으면 한국의 오랜 전통과 미풍양속이 공격받는 것 같아서 자존심도 상했고, 뭔가 확실한 반박을 하고 싶기도 했는데 당시 적당한 반박 논리를 만들지 못해 논쟁에서 진 것 같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나이가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Torsten의 말에 나 역시도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공감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요즘 한국에서 전철 타면 임산부석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앉아 있는 남자들을 보기도 하는데, 그런 기본 에티켓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보면, Torsten 말처럼 실제 나이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서울에서는 너무도 자주 보게 되는 등산복 차림의 술 한잔 거하게 하신 어르신 및 중장년 층부터 젊은 직장인 심지어 중고등학생도 임산부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굳이 임산부석으로 표시된 좌석 양끝 핑크색 자리에 앉아 있는 분들. 가운데 텅 빈자리가 눈에 띈다. (2017년 1월)
옆에 빈자리가 꽤 있어도 굳이 임산부석을 골라서 앉는데, 고개라도 숙이면서 모른 척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오히려 고개를 곧게 세우고 눈 멀뚱멀뚱 뜨면서 전혀 이상한 것이 없다는 식으로 주변 지나가는 사람들을 주시하는 사람들도 많다.
또 사람이 꽉 찬 비좁은 전철 안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서, 앞에 서 있는 승객이 그 다리를 피해 일정 공간을 두고 뒤로 물러서 있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고 그렇게 앉아 있는 사람들도 종종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 역시 젊은 사람도 있고, 중년 이상도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몰지각함 또한 나이와는 관계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서로 다른 세대를 비난하는 데에는 또 이런 분들이 유독 매우 적극적이라는 것이다. 전철안이나 인터넷에서 가끔 접하는 말로 "요즘 젊은 사람들은 버릇이 없다"는 얘기나, "늙은 사람들이 왜 바쁜 시간에 기어 나와 전철 안에서 민폐 끼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라고 주장하는 부류의 사람들 중에는 이런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주장은 어찌 보면 자신의 과거 혹은 미래의 모습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홍콩에서 같이 근무했던 홍콩인 직원이 서울 여행 왔을 때, 인사동에서 만나 술 한잔 하면서 한 얘기가 있다. 그의 말은 한국에 여러 번 와도 여전히 이해 못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서울은 거리도 깨끗하고 사람들도 깔끔하게 차려 입고 또 사람들 예의도 바르며 친절하기까지 한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나이와 성별과 관계없이 꽤 많은 한국 사람들이 전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길거리에서 침을 뱉는다는 것이다.
분명히 홍콩보다 깨끗하고 예의 바르고 친절한데, 침 뱉는 것만은 예외로 홍콩에 온 중국인들이 길에서 마구 침 뱉어 무시당하고 비난받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나 역시 길거리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연스럽게 침 뱉는 어르신들이나 젊은이 또 학생들까지 너무도 자주 목격한다. 참 보기 안 좋고 이해가 안 되는 끈질긴 한국인의 전통(?)인 것 같은데, 분명한 것은 이렇게 침 뱉는 사람들 역시 나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결코 한국만큼은 아니겠지만, 프랑스 사람들도 상대적으로 유럽 인접국 대비 거리에서 침을 잘 뱉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프랑스 인근 국가에는 그런 프랑스 사람을 조롱하는 표현으로, "침 뱉으려면 프랑스로 가서 뱉아라"라는 말까지 있다고 한다. 조만간 우리의 이웃국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혹 "침 뱉으려면 한국 가서 뱉아라"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지 걱정이다.
Margaret이나 Torsten, Stephan 만큼 가까운 친구들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기억에 남는 친구들도 있다.
나보다 나이가 서너 살 정도는 젊은 일본 여자였는데, 같은 반이라서 이따금 둘이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었다. 식사를 하면서, 한일 간의 갈등이나, 일본의 재일교포 같은 민감한 화제가 언급되기도 했는데, 그 친구 인식에 의하면 일본의 재일교포와 한국인은 다르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자신은 재일교포와는 결혼할 생각이 없지만, 한국인과는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결혼 얘기를 물은 적은 없고, 그녀가 스스로 그런 화제를 예로 들었다)
같은 한국 민족인데, 한국에 사는 한국인은 되고 왜 일본에 사는 한국인은 안 되는지 더 이상 묻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재일교포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 감정이 있는 것 같았다. 중국 영토에서는 챠우시엔주(조선족, 朝鮮族)라고 불리고, 일본 땅에서는 조센징(조선인, 朝鮮人)이라 불리며 저 멀리 중앙아시아에서는 까레이스키(고려인, 高麗人)라 불리는, 자의 반 타의 반 이 나라 저 나라로 뿔뿔이 흩어진 채, 삶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 동포들의 아픔을 그녀의 그러한 인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10대 후반의 일본 남학생 한 명도 같은 반이었는데, 수업 중 자국 내 외국인 생활이나 이슈에 대해 발표를 하는 시간에, 이 친구가 너무 어려서인지, 아니면 일본이 워낙에 그러한 이슈에 대해서는 교육을 시키지 않아서인지 수업에 참여한 학생 전원의 말문이 막히게 하는 대단한 주장을 한 적도 있었다.
그 친구 말은 일본에는 외국인이 너무나 많아 이제 더럽고 어려운 일들은 일본인은 안 해도 되고, 모두 그 외국인들이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러운 일은 그렇게 외국인들이 하면 된다는 식으로 전혀 거침없이 너무나도 천진스럽고 온화한 미소까지 지으며 언급을 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순간 교실 전체가 얼음물을 뿌린 듯이 썰렁해졌고, 선생도 수습을 못하고 할 말을 잃고 서 있기만 했는데,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전술한 나보다 서너 살 젊다는 일본 여자가 막 화를 내면서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하냐? 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애로, 방금 한 얘기는 모두 틀린 말이니 전부 무시하라"라고 서둘러 정정했다.
그래도 좀 더 나이가 있고, 해외 경험이 많은 30대 초반의 일본 여자가 화를 내면서까지 급히 정정을 해서 그 이상한 분위기는 간신히 무사히 넘어가기는 했다.
하지만 역시 같은 반에 있었던 비슷한 나이의 10대 독일 남학생이 자신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인 2차 대전 중 발생한 유태인 학살, 인종주의 등 독일의 잘못에 대해서 너무나도 철저히 반성하고 또 현재 독일 내의 외국인 또는 인종 관련 이슈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너무나 조심스러워했던 것과는 극단적으로 비교가 되는 상황이라독일과 일본의 후세에 대한 교육 차이를 극명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백지 같은 어린 학생들에게 어떠한 교육을 시키고, 어떠한 교육을 안 시키느냐에 따라 독일의 10대 학생과 같은 말이 나오거나, 일본의 10대 학생 같은 말이 나오는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절실히 체험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또 다른 일본인 학생 얘기인데, 나와 나이가 비슷했던 남자 학생이다. 그 친구와 단둘이 한국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김치찌개를 하도 잘 먹길래 "너 김치찌개 좋아하냐?"라고 했더니, 대뜸 "너 우리 조상이 한국에서 왔다고 얘기하려고 그러지?"라고 먼저 반문하는 것이었다.
아마 전에도 자신이 김치찌개 잘 먹는 것을 본 한국인들이 한국인 사이에서는 매우 흔하게 말하듯이 일본인의 조상이 한국에서 왔다는 얘기를 이미 몇 번 했던 모양이었다.
일본 역사서에도 백제 멸망 후 일본 인구가 수십 년 만에 그 당시에는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할 만큼 급증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고, 한국어와 일본어 문법이 너무나 흡사한 것 또한 일본에 백제, 신라, 고구려를 상징하는 지명이나 흔적들이 너무 많은 것으로 볼 때, 한반도에 거주하던 사람들 일부가 일본으로 대거 이주했다는 주장은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하지만 일본인들을 보면, 그들 중에서도 분명히 서로 달라 보이는 그룹이 있는데, 피부가 더 희고 한국인과 비슷하게 생겨 우리와 구분이 잘 안 되는 일본인이 있는 반면, 피부가 좀 더 검고, 털이나 수염이 한국인보다는 월등히 많은 다른 모습의 일본인이 있다.
후자 그룹은 한국에서 통상 볼 수 있는 한국인의 특징과는 많이 다르다. 그런데 김치찌개를 좋아했던 그 친구는 누가 봐도 외관상 후자 그룹에 속하는 일본인으로 그의 조상이 한반도에서 왔을 가능성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친구는 그 한국식당에서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고서 대뜸 하는 말이 "저건 분명히 중국풍 그림인데 왜 중국풍의 그림을 한국식당에 걸어 놨을까"라고 말한 적도 있다. 나는 그동안 그런 그림이 거기에 걸려 있는지도 사실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고, 더더욱이 그 그림이 중국풍이라는 것도 알 수 없었는데 그 말을 듣고 좀 더 유심히 보니, 그의 말 대로 확실히 한국풍 그림은 아니고 중국풍 그림 같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식사한 그 한국식당 자리는 원래 중국식당 자리였다는데, 가게를 인수한 후에도 벽에 있던 기존의 중국 그림 등은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자신은 사무라이 가문의 후손이라고 했던 이 친구의 일본과 일본 사무라이에 대한 자긍심은 대단했었는데, 이와 반대로 중국에 대한 경계심 혹은 반감은꽤나 깊어 보였다. 아마도 벽에 걸려 있는 동양화 국적을 중국으로 정확히 맞춘 것도 중국에 대한 그러한 경계심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한국에 대해서는 이미 이전에 한국인과 많은 말다툼 경험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내 면전에서 얘기하기가 귀찮아서인지 말을 아껴서 이 친구와는 한국에 대한 민감한 사안은 별로 언급할 기회가 없었다.
이 친구 말 중 또 기억나는 것이 "나는 너처럼 그런 아저씨 같은 잠바는 절대 입지 않는다"는 말인데, 나를 무시하거나 공격적인 의도로 한 말은 결코 아니었고, 그처럼 촌스러운 옷을 입고 Paris 거리를 활보하는 내가 좀 답답해서 하는 말이었다.
사실 나는 의복에 대한 관심이나 감각이 좀 많이 둔해, 비싼 옷은 절대 안 사고, 아무 옷이나 대충 너무도 보기에 안 좋게 입고 다녔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그로 인한 수모도 꽤 자주 겪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중국에서는 내가 거주하던 고급 아파트에 들어가는데 번번이 단지 입구에서 경비에게 외부 잡상인으로 오해받아 제제를 받기도 했고, 또 Paris에서는 친구 아파트 놀러 갔는데 아래층 경비가 그 고급 아파트에 거주하는 친구가 아니라 그 아파트에서 청소하는 친구를 만나러 온 것 아니냐고 질문할 정도였다.
Stephan, Margaret, Torsten, 그리고 다른 친구들 모두 한 번은 보고 싶지만, 이미 수십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 아무도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 안타깝다.
22년 전 정말 한참 젊은 시절, 그들과 Paris에서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객지의 외로움도 달래고 인생의 즐거움도 느꼈을 것이며 또 다양한 국가에서 온 그들로부터 또 다른 세상의 많은 새로운 것들을 터득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 역시도 사소한 것이나마 뭔가를 내게서 배우고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던 우리 모두가 이제는 그렇게 만나고 대화를 나누었던 Paris라는 그 공간을 떠나서 각자의 나라 어디에선가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헤어진 이후 20여 년간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 또한 청춘과 젊음으로부터는 조금씩 멀어져 왔을 것이며, 이제 얼굴에 주름이 조금씩 생기면서 그만큼 인생의 마지막 커튼으로부터는 가까워져 가는 그런 과정을 거치며 살고 있을 것이다....
이제 그 그리운 친구들의 늙어가는 모습조차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그렇게 Paris라는 이방의 땅에서 만났던 이방인 친구들과의 추억도 점차희미해져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