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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읽는 여자 Jun 15. 2022

완소녀의 커피와 책

커피 마시고 책 읽는 시간

대기업 경력직 면접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젊은 친구들이랑 나이 갭이 있어서 일하기 힘들지 않겠어요? 어떻게 대처하실 거예요?"


면접관이 말한 젊은 친구들이란, 대졸 신입 공채, 20대 초중반을 의미하고, (2013년의) 나는 30대 초중반이니 10년의 갭을 어떡할 거냐는 딴지였다.


그 순간 당황했다. 면접관의 의도가 정확하게 먹힌 질문이었다. 나이스 퀘스천!


그리고 면접관은 의기양양했다. '봤지? 봤지? 내가 또 한 방 먹였네.' 아마도, 나의 운과 명이 결정될 그 순간에 영화 <몽골>이 떠올랐다.






<몽골>은 12세기 몽골을 배경으로 몽골제국의 창시자 테무진이 칸이 되기까지의 스토리다. 1192년 테무진 나이 9살부터 이야기는 시작되는데 몽골 풍습에 따라 9살이 된 테무진은 아버지와 함께 신부를 구하러 떠난다. 그 길에서 칸이었던 아버지를 잃고, 테무진도 죽음의 위험에 처한다. 피로 형제를 맺은 자무타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하지만 적에게 신부를 빼앗기고, 나중엔 노예로 팔려가게 된다.


영화는, 테무진의 9살부터 14년간의 파란만장한 세월을 다룬다.


1206년 테무진은 드디어 몽골을 통일하고 몽골제국의 진정한 칸이 된다. 그전에, 테무진은 생명의 빚을 진 형제 자무타와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하게 되는데 자무카의 막강한 병사력에 비하면 테무진의 병사는 하품 나오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테무진이 이겼다. 변수는 '번개'였다.


자무카는 막강한 병사력에도 불구하고 전쟁 중 천재지변으로 발생한 번개 때문에 패배한다.


(자무카)

"한 가지 묻지.

모든 몽골인들은 번개를 두려워하는데 어째서 자네는 두려워하지 않나?"


(테무진)

"내겐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었어.

맞서니 더는 두렵지 않았네."





면접관의 나이스 퀘스천으로 나는 아웃이 분명해졌다. 그날 면접은 내게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는 막다른 장소였다. 질문을 받는 순간, 나는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멸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나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꺼져버리기엔 내 인생이 너무 안타까웠다.


맞서기로 했다. 더는 두렵지 않았다(고 하고 싶지만, 두려웠다. 두렵지 않은 척 연기를 해야 했다.).


"제 별명이 완소녀예요." 나이스 퀘스천을 던진 면접관이 폭소를 터뜨렸다. 옆에 앉아있던 면접관이 제지를 시킬 정도였다. 면접관이 실컷 웃을 때, 머릿속으로 그다음 말들을 연결시켰다.


"완전 소중한 여자가 아니라 '완전 소처럼 일하는 여자', 그래서 완소녀예요."


또 한 번 폭소가 터졌다. 이게 그렇게 웃긴 대답일까? 그다음 워딩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완전 소처럼 일하는 여자에서, 게임은 끝났으니까.


합격 후 그 회사에서 소처럼 일하지 않았다. 완소녀는 사실 뻥이었다.


완전 소처럼 일하면 커피 마실 시간, 책 읽을 시간이 없다. 커피 마시고, 책을 읽을 시간을 갖지 못하면 인생이 즐겁지 않다. 회사에서 일하는 이유는, 돈을 버는 이유는, 커피 마시고, 책을 읽을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시간'을 투자해 '시간'을 버는 셈이다. 완전 소처럼 일해버리면 지쳐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시간을 투자하고, 시간을 번 것이 아니라 시간을 (셀프로) 갖다 바치고 온 것이다. 커피 마시는 시간도 귀찮고, 책을 봐도 글자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아한 연인>에서 케이티의 아빠는 말했다.


아버지는 살면서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아무리 풀이 죽고 기운이 빠져도, 자신이 언제나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 처음 커피를 마시는 순간을 고대하는 한은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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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 앞 계단에서 피우는 담배나 욕조에 몸을 담그고 먹는 생강 커피의 즐거움과 맛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면, 십중팔구 쓸데없는 위험 속에 몸을 담갔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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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반드시 소박한 즐거움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아함이나 박학다식처럼 온갖 화려한 유혹에 맞서서 소박한 즐거움을 지켜야 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게는 찰스 디킨스의 책들이 아버지의 커피 한 잔과 같은 역할을 했다. 소외계층에 속하면서도 용감한 책 속의 젊은이들과 아주 적절한 이름을 지닌 악당들에게 조금 짜증스러운 구석이 있는 것은 솔직히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우울할 때도 디킨스 소설을 읽다가 정거장을 지나칠 만큼 책에 몰입할 수만 있다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현대문학, 서창렬 옮김, 209~210쪽, 2019.



완소녀의 실체는, 완전 소중한 여가생활(커피와 독서 타임)을 위해서 오늘도 일을 한다. 돈을 번다. 내일 아침 내려 마실 커피를 생각하면 지금부터 기쁘고, 읽고 싶어 안달 나 미치는 책들이 상시 옆에 대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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