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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Sep 01. 2021

등교하는 딸에게 밥보다 중요한 건

아침 7시 40분, 초밥이를 깨웠다. 일어나자마자 교복 치마부터 입는 녀석을 보고 월요일인데 데려다줄까 하다가 그러다 버릇 들면 큰일이니까 꾹 참았다. 6월부터 딸이 다니는 중학교가 통학버스를 운영해서 얼마나 편해졌는지 모른다.     


가방을 챙기며 초밥이가 말했다.

"오늘부터 명예경찰이라 일찍 가야 하는데 늦었어."

"몇 시까진데?"

"8시"

그때는 7시 50분이었다.

"빨리 말하지. 데려다줄게."

"엄마 글 써야 하니까 택시 타고 가려고 했지."

그런 정신 조아쓰, 하려다가 바쁘니까 일단 나가자고 했다.     


차에 타자 초밥이는 샌드위치는 안중에도 없고 화장부터 했다.

"이것부터 먹어."

"난 이게 더 중요해."

우리가 중요한 ‘이것’이 다른 순간.  

 

화장을 곱게 하고 샌드위치를 먹는 딸

  

"보미 안 짖게 해."

나한테 엄하게 주의를 주고 차에서 내린 녀석은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갖은 폼을 다잡고 교문을 통과했다. 아무도 안 쳐다보는데 혼자 연예인 출국 장면을 연출하는 딸의 뒷모습을 보고 가소로운 웃음이 새어 나오는 한편 기시감이 들었다. 내가 방금 빠져나온 곳을 딸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걸 보는 기분이랄까.     



30년 전(야속한 세월아), 나는 소풍을 가려면 한 달 전부터 입고 갈 옷을 준비했다. 잡지로 셀럽들의 패션을 연구하고 동성로에 가서 시장 동향을 살폈다. 쎄 보이지만 과하지 않고 날라리 같은데 싼 티 나지 않는 스타일을 추구했다. 결과는 멋 부리느라 애쓴 흔적만 역력한 어설픈 패션이었지만 이게 또 희한하게 또래들한테는 먹혀들었다. 우리 학년에서 네가 옷을 제일 잘 입었데, 라는 손발 오그라드는 평가를 듣고는 했으니.     


한 번은 소풍을 파하고 들뜬 기분에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친구들과 롤러스케이트장을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전용 비행기라도 타고 온 건지 우리 학교 일진이 착실하게 출석해있었고, 그날 대구시내에 소풍 갔다가 집에 가기 싫은 어린 영혼들이 죄다 모여 있는 것처럼 대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장차 롤러스케이트장이 탈선의 온상이 될 줄 몰랐던 아빠는 오빠와 나를 두류야외 스케이트장에 자주 데리고 갔다. 일부러 시간을 내고 스케트를 빌려준 아빠가 흡족해하려면 적어도 반나절은 쉬지 않고 타야 한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음료수도 마셔가면서 좀 쉬엄쉬엄 타, 그렇게 재밌냐? 원 녀석도’ 하며 만면에 웃음을 띤 아빠의 얼굴을 보면 나는 고생한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오늘은 그때 흘린 땀의 두 번째 보상을 받는 날이었다. 아스팔트에서 다섯 시간씩 발통을 굴려온 나는 반들반들한 실내 스케이트장은 가뿐하게 미끄러져 다녔고, 음악과 조명이 가득 채운 그곳이 마치 나를 기다리는 무대라도 되는 것 같았다.  

   

“우리 학교 통이 사귄다는 남자도 여기 왔데.”

친구가 말했다. 우리가 소풍 간 곳에 통의 남자 친구네 학교도 왔다더니 같이 왔나?

“근데 그 남자가 너 누구냐고 묻고 다닌다는데?”

“그걸 통이 지금 알아가지고 완전 열 받았데.”

아까 흘끔 봤을 때 통이 내 쪽을 보고 있었는데, 그게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이었나? 아, 이를 어쩌지.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 되지 않으려면 이만 가는 게 좋겠다 싶었다.


마지막으로 몇 바퀴만 더 타고 가자는 친구에 말에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데 한 남자애가 뒤에서 다가왔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음악소리에 묻혀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그 애는 스케이트를 못 타는지 나와는 금세 간격이 벌어졌다. 쟤 뭐야, 하고 앞쪽을 바라보는 순간 일진들이 나를 해 손짓하고 있는 게 보였다. 뭐야,  금방 말 시킨 게 남자 친구?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이제야 나는 집에 몹시 가고 싶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일진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니한테 뭐라 카던데?”

“어?”

“글마가 뭐라 캤냐꼬.”

“못 들었는데... 시끄러워서.”

통은 얼굴을 찌푸린 채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나한테 가도 좋다는 손짓을 했다.      


나는 호랑이굴에 들어갔다 살아 나온 것 같았고, 내 가슴에는 통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는 걸 느꼈다. 어쩌면 그 아이는 소문처럼 무서운 애가 아닐지 몰라, 통의 넓은 아량에 감격하고 말았다. 이후에 통은 한동안 날 찾아와서 노래방을 가자, 자기들 아지트를 가자며 나를 일진 무리에 영입하려고 했고, 나는 통이 기분 나쁘지 않도록 세심하게 살피면서 거절하느라 진땀을 뺐다.



     

30년 후, 다시 현재.

“엄마 아줌마 같지?”

운동하러 나가려다가 초밥이한테 물었다.

“아니. 아저씨 같은데?”

푸핫, 진짜네,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한 거울 속 내 모습은 건장함과 근엄함이 풍기는 게 딱 아저씨 같았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한가인이 될 뻔했던(그건 아닙니다만) 여자는 이제 아줌마에서 아저씨로 진화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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