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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Sep 07. 2021

맨발의 달리기

이제야 삶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한 번은 딸이 친구가 엄마와 둘이 산다고 하길래 내가 “우리랑 똑같네?”라고 했다. “아니야, 아빠가 다른 지방에서 일해서 따로 사는 거야.” 해서, 내가 “그건 공식적인 이유일 뿐”이라고 했다. 눈을 흘기는 딸에게 이번에는 “별거는 이제 대세”라는 말을 덧붙였다. 내가 뻔뻔했나? 딸이 우리 집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라고, 아빠와 관련된 얘기를 언제든 편하게 하기를 바라는 (깊은) 뜻에서 한 말이었다.  

    

사실 내가 선을 넘을 때가 있긴 하다. 아빠와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끝낸 딸에게, 

“할 말 없는데 되게 길게 통화한다, 그지?”라고 했다가 딸한테 혼났다.

“같이 안 사니까 그런 거잖아. 왜 그래?”

아차, 싶었다. “아, 엄마가 실수했다. 미안해.”

“몰라. 나가.”

나는 강퇴를 당해도 싸다.    

 

나도 사람인데 맨날 성인군자 같을 수야 있나. 어쩌다 비꼬는 말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딸이 제 아빠를 감싸는 모습을 보면 서운한 게 아니라 안심이 된다. 딸에게 아빠를 뺏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어쩌면 나는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 실없는 소리를 하는지도 모른다(이번에도 깊은 뜻이 있었다).  

    

아빠와 중국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을 보고 내가 “중국 사람이랑 찍었어?”라고 하자 초밥이는 이렇게 응수했다. “아빠는 엄마 얘기 안 하는데 엄마만 하는 거 알아?” 이에 나는 표정관리에 만전을 기하며 “지지 않는 정신 좋아쓰”하고 씩 웃어줬다. 

    

남편에 대한 원망을 딸한테 하지 않으려고 애쓴 보람이 있었다. 그건 나를 피해의식에 가두지 않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 자식에게 어쩔 수 없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보다 실패를 인정하고 그 길에서 최선을 하는 걸 보여주는 게 낫다고, 이제는 생각한다.      


살다 보니 살아지고 지금에 와서는 예전에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다른 길에도 삶은 이어지고, 그 속에서 기쁨을 발견해나가는 노력만 하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도 괜찮고, 나 하나만 지킬 수 있다면 딸도, 가족도, 친구도 그대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얼마 전에 만난 지인이 남편과의 갈등 때문에 힘들어했다. 내막을 시시콜콜 말하는 게 어떤 해결도 될 수 없다는 걸 아는 우리는 다른 얘기로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지인은 한숨을 쉬었고 그걸 보는 내 마음도 편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이 감정에서 벗어날 방법을 고민하는 것 같았다. 거기다 대고 나는 최근에 읽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심판>을 화제에 올렸다.     


<심판>은 영화 <신과 함께>처럼 사후에 지난 생의 판결을 받는 내용이다. 천국의 검사는 책임감 있는 변호사이자 가장이었지만 자신의 재능과 사랑을 위해 도전하지 않은 주인공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이의를 제기하는 주인공에게 판사는 "천국의 가치관은 지상의 그것과 같지"않다고 한다.  

    

"당신은 배우자를 잘못 선택했고, 직업을 잘못 선택했고, 삶을 잘못 선택했어요. 순응주의에 빠져서! 그저 남들과 똑같이 살려고만 했죠."

     

젊은 시절 주인공은 연극배우였고 고백은 하지 못했지만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배우일도 그만둔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평생 외도를 하지 않았고 성실하게 살았다. 하지만 천국의 판사는 위대한 배우가 될 자신의 재능을 썩히고 사랑하는 여인을 찾지 않은 주인공을 비난한다.     


평소라면 지인과 나 사이에 충분히 흥미롭게 얘기할만한 소재였다. 하지만 시기를 잘못 골랐다는 걸 나는 그녀가 돌아가고서야 깨달았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꺼냈을까 후회가 되었고, 곧 나의 자격지심 때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내가 한 선택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던 거였다.     


예전에 내가 어떤 결정도 하지 못하고 방황할 때 가까운 사람들에게 들은 말로 나도 상처 받아놓고 그새 잊어버린 건가, 어이가 없었다. 나만큼 내 처지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고 고민하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힘드니까 친구에게 사정을 털어놓고는 친구가 하는 말에 서운해했다. 친구가 해결해줄 수 없고 친구로서는 그 정도의 말밖에 할 수 없는데도.     


한 가지는 알게 되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이 하나는 아니라는 것. 행복한 가정의 모델이 정해진 게 아니라는 걸 말이다. 나의 편협한 시선 때문에 소외를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았고, 소중한 깨달음일수록 머리로는 부족하고 결국 자기가 경험하고 아파봐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어이쿠야,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이제야 삶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고 맨발로 달리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오돌토돌한 모래, 흙, 돌멩이를 밟고 대지의 기운을 고스란히 느끼며 달리는 것 같았다. 사는 게 이런 거다 이거지? 그래, 좋아, 한번 덤벼봐, 하는 기분.      


우리는 자기의 불안으로 상대를 보는지 모른다. 나의 불안이 향하는 그 부분만 크게 보이는 게 아닐까. 다 괜찮아졌다고 이제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쿨함의 지존 격인 감독이자 작가인 노라 애프론도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혼은 상처다,라고 책에 쓴 걸 본 적이 있다. 솔직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잠시 가깝게 지냈던 사람과도 감정이 상해서 더 이상 보지 않는 사이가 되면 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을 콕콕 찌르는 아픔을 느끼는데, 가족이었던 사람이야 말해 무엇할까.    

 

다음날 지인에게 어제 괜한 얘기를 꺼냈고, 그냥 들어주기만 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지인은 아니라고 그저 같이 있어줘서 고마웠다고 했다. 괜찮아졌다는 섣부른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 맨발의 달리기는 계속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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