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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Sep 14. 2022

반고개 무침회에 대한 단상

주가 약속 장소로 정한 곳은 대구에 있는 무침회 전문 식당이었다. 메뉴판에는 소 18,000원, 대 23,000원 그리고 주류만 달랑 적혀있었다. 주문한 무침회 소가 나왔다.   

  

“전라도민들이 경상도 식당에 가면 실망한다는데 이제 나도 그 심정 알겠다. 이건 전라도에서 밑반찬도 덜 나온 수준이야.”     


대구에서 30년을 꽉 채운 토박이 주제에 나는 이런 변절자 같은 대사를 읊었다. 심지어 이 동네 주민을 사귀어서 무침회를 맛나게도 먹고 다닌 시절이 있었다는 건 나도 알고 주도 알고 있었다. 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예전에 네가 했던 말 중에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있어.”

“그게 뭐든 쓰레기니까 잊어버려.”

“너는 전용 기사, 가정부, 비서 세 명을 고용할 정도가 되면 성공한 거라고 했는데 기억나냐?”     


기억난다. 이놈의 몹쓸 기억력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것은 자동 삭제되는 약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주와 사이좋게 나눠먹고 싶었다. 자기 계발서를 읽으며 학원일을 미친 듯이 할 때였는데, 나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는 게 무슨 자랑이라고 그렇게 떠벌렸는지 모르겠다.     


변절자가 찍은 사진, 다시 보니까 맛있어 보이는데?

우연히 들어간 카페의 옆 테이블에는 60대 초반 정도 보이는 여성 두 분이 앉아있었다. 곧이어 비슷한 연배의 여성 한 분이 들어왔는데, 컬이 들어간 짧은 단발에 청바지, 캔버스화로 멋을  한 눈에도 세련돼 보였다. 세 분은 만나자마자 “고춧가루부터 싣자”하면서 우르르 밖으로 나가더니 잠시 후 들어왔다.    

 

“돈은 통장으로 넣어줘.”

염색을 하지 않은 머리에 품이 넓은 난방을 입은 분이 말했다. 아마도 이 분이 고추농사를 지은 걸 친구들이 구입하는 상황 같았다. 멋쟁이인 분이 돈봉투를 내밀며 덧붙였다.


“나 그런 거 할 줄 몰라.”

“얼굴은 신식으로 생겨가지고 왜 할 줄 몰라?”
“돈은 시어야 맛이잖아.”

그러면서 멋쟁이 친구는 상자 두 개를 더 내놓았다.     

“너 조이는 거 싫어해서 골라봤어.”

“이게 뭐야? 열어봐도 돼?”
상자 안에는 찰랑거리는 원피스가 들어있었다.

“어머머, 얘, 너무 마음에 든다.”

옷을 몸에 대본 친구는 무척 마음에 드는지 카운터에 가서 “사장님, 저 옷 선물 받았어요”하고 카페 사장에게까지 자랑했다. 이때 나와 눈이 마주쳐서 나도 웃어 보였다.    

 

이상하게 친구를 만날 때 옷차림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 그건 몇 살이 되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시간과 돈이 나보다 여유 있는 친구라면 만나기 전부터 뭘 입을지 고민된다. 아니나 다를까 세월이 친구에게만 비켜간 듯 화사한 모습으로 나타난 친구 앞에서 내 안에서는 질투란 놈과 격한 싸움이 벌어진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서 과하게 치장하는 건 어쩌면 미안한 일이다. 친구 사정을 안다면 소박한 차림도 배려일 수 있다. 카페의 그분처럼 비싸지 않은 작은 선물을 준비하면 더 좋겠다. 소녀처럼 좋아하는 친구 모습에 더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 될지 모르니까. 연륜에서 묻어나는 아름다움인가, 나는 그분들을 한참 바라봤다.

      



학원 그만두고 처음으로 돈에 쪼들려봤더니 돈을 알겠더라. 이전에 나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 같아. 그런데 그거 알아? 그때가 더 불안하고 쫓기는 기분이었다는 거. 그걸 감추려고 너한테 너무 많은 말들을 했던 것 같다.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사고를 치는 통에 매일이 버라이어티해. 어떤 사람은 사는 게 지겹다고 하는데 나는 모르겠어.”     


네가 이 말을 했을 때, 예전의 나라면 스스로 위안하는 말일 뿐이라고 생각했을지 몰라. 하지만 전북도민이 된 나는 매일 자라는 아이를 보면서 새로운 날들을 사는 기분이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어.   

  

기사, 가정부, 비서가 있었다면 너를 보는 마음이 더 여유로웠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아. 지금보다 몇 배의 수입이 있었을 때, 내가 과시하고 싶어 조바심치는 모습을 너는 기억할 테니까.

   

너를 만나면 과거의 한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야. 이제 것 내 말만 하느라 네 말을 제대로 들은 적이 없다는 걸 알았어.  초, 중, 고에 다니는 세 명의 자녀의 어머니, 내 친구, 이제야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는 너를 만난 기분이다. 자식이 적어도 세 명 정도는 되어야 어머니라고 불릴만한 거 아니겠어? 겨우 하나인 내가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그지? 내가 한 쓰레기 같은 말은 버리고 좋은 것만 담으며 늙자. 그리고 무침회는 전라도에서 먹자.     

이날도 우리는 최선을 다했구나

참고로 그날 전북도민은 등산복을 입고 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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