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행복이 있는 섬 '돈없이도' 04
산책 중 뒤에서 어른 두 분이 하는 이야기가 들렸다.
“혼자 살아요. 아저씨가 석 달 전에 먼저 갔어요.”
“지병이 있었어요?”
“신장암이었어요.”
“그게 그렇게 무섭다고 하더라고요. 자식들은...”
다음 말은 듣지 못했지만 조심스러운 말투로 봐서 원래 아는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여성 어른들은 처음 만나도 내밀한 개인 사정을 쉽게 꺼내놓는 것 같다. 예전에 함께 살 때 엄마는 놀이터에서 만난 애기 엄마들에게 “남편은 한 달에 얼마 법니꺼?”같은 걸 물어서 나를 기함하게 했는데, 제발 그런 것 좀 묻지 말라고 해도 엄마는 뭐 어떠냐고 했다. 공평하게 나에 대해서도 얘기했겠지.
월명산 주위에는 슬레이트 지붕에 작은 마당과 툇마루가 있는 오래된 집들이 많다. 집만큼 연세가 많은 어른이 혼자 살고 있거나 비어있는데, 주인 없는 빈집에도 개나리, 매화가 담장을 넘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그중 낮은 담너머로 마당이 보이는 한 집에서는 가끔 요양보호사로 보이는 분이 빨래를 하는 건 보았지만 어른은 거동이 불편한지 볼 수가 없었다. 오늘 그 앞을 지나는데 어쩐 일인지 방문이 열려있고 짐이 빠진 것 같았다. 늘 한쪽에 세워두었던 전동휠체어마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요양병원으로 가셨나. 아니면... 얼굴도 모르는 분인지만 어쩐지 내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방에 누워 요양보호사가 해준 밥을 먹는 집주인을 떠올리고 언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마당에 나와있는 모습을 나도 모르게 바랬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나도 혼자 남는 시간이 올 텐데 그때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2인 가족으로 살고 있는 나는 15살 아이가 바라보는 시선을 나에게 가져오고 쉽게 흥분하고 침울해하는 아이의 모습에서 부러움과 생기를 느낀다. 아이가 언젠가 나를 떠난다면(지금도 반쯤은 떠났다고 볼 수 있지만) 사소한 감정을 나눌 사람이 사라진다. 생활에 숨을 불어주는 건 대단한 것보다 작은 걸 나누는 일이 아닐까.
봄의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는 일요일, 월명산을 산책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초밥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짜장면 먹을래?”
“좋아.”
“5분 뒤에 내려와.”
우리 동네에 있는 <동네 중국집>으로 갔고 식당 안에도 자리가 있었지만 우리는 언제나처럼 가게 앞 평상에 자리를 잡았다. 직원이 “춥지 않겠어요?”라고 했지만 나는 “노 프라브럼”이라고 했고 직원이 들고 온 물걸레로 탁자를 닦았다. 초밥이가 엄마 좀 그러지 마, 라며 눈을 흘겼다.
“가위 바위 보 해서 진 사람 단무지 떨어지면 갖고 오기, 어때?”
“좋아.”
3전 2선승제. 주먹을 두 번 내고 내가 이겼다.
“5전 3선승제로 해줄까?”
“좋아.”
가위밖에 낼 줄 모르는 녀석을 또다시 주먹으로 이기고 말했다.
“마지막 쐐기를 박는 기분이다야.”
내가 탁자를 내리치는 시늉을 냈지만 녀석은 웃지 않는 걸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나는 딸 덕분에 가벼운 기분을 유지한다. 이 글을 쓰는 중에도 초밥이가 자기 방 베란다에 매달려서 우리 집 아래 찾아온 남학생 두 명과 노닥거리길래 나도 옆에 매달리자 남학우들이 “안녕하십까”하며 차렷 자세로 인사를 했다.
“네 방에 쌓여가는 쓰레기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 엄마의 노력을 보여주는 거야. 한번 봐봐, 엄청나지 않냐?”
인내심도 길러준다.
소설과 영화로 나온 <밤에 우리 영혼은>에서 애디와 루이스는 서로 나이 들어가고 배우자와 사별하는 모습을 지켜본 오래된 이웃이다. 어느 날 애디가 루이스를 찾아가 밤에 한 침대에 누워 잠들자는 제안을 하기 전까지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안 잡혔어요. 마치 당신한테서 기습을 당한 것 같았으니까.”
“지금은 괜찮지 않아요?”
“좋은 기습이었으니까요. 기습이 아니었다는 건 아니고, 다만 당신이 어떻게 내게 그런 제안을 할 생각을 했을지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돼요.”
“말했잖아요. 외로움 때문이라고요. 밤에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고요.”
그들은 누가 했더라도 상관없을, 어쩌면 혼잣말 일지 모르는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 시간에서 후회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지만 정작 그 대상은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누군가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무거웠던 마음을 덜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상대도 나와 비슷한 시간을 통과한, 어떤 선택에도 회한은 남는다는 걸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
“난 그냥 하루하루 일상에 주의를 기울이며 단순하게 살고 싶어요. 그리고 밤에는 당신과 함께 잠들고요.”
“그래요. 우리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죠. 우리 나이에 이런 게 아직 남아 있으리라는 걸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예요. 아무 변화도 흥분도 없이 모든 게 막을 내려버린 게 아니었다는, 몸도 영혼도 말라비틀어져버린 게 아니었다는 걸 말이에요.”
노년이 되면 물건도 사람도 그다지 많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무의미한 관계나 감정 소모를 하는 관계보다 사려 깊고 나에게 열려 있는 한 두 명의 사람이 있다면 어떤 재력보다 삶을 풍요롭게 해 줄 것 같다.
최초의 혼자인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은 잔잔하지만 여전히 일상의 기쁨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향 좋은 커피를 내려 마시고 집 앞에 핀 꽃을 마주하는 날들을 보내기를. 그리고 옆집에 로버트 레드포드가 사는 행운이 나에게 깃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