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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Oct 28. 2022

학원은 어쩌고요?

단단한 행복이 있는 섬 '돈없이도' 프롤로그

연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내일 시에서 위탁받은 아파트 옹벽 벽화 작업을 하는데 교통정리를 할 아르바이트생을 못 구했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내일 오후 4시까지 아무 일정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8시, 나는 언니가 알려준 장소에서 교통 경찰관처럼 야광봉을 착착 뻗었다. 하지만 차가 생각보다 별로 없어서 교통은 알아서 정리된다는데 언니와 나는 의견을 모으고, 오후에 나는 전선 까기 작업에 투입되었다.     


선을 싸고 있는 고무를 제거하고 전선을 2센티미터로 자르는 작업이었다. 보도블록을 방석 삼아 벽을 보고 묵언수행을 하고 있는데 누가 나한테 말을 걸었다.     


“원장님이 여기 어떻게...”

크레인으로 벽화 설치물을 부착하러 오신 분이 내가 전에 거래했던 광고사 사장님이었다.

“제가 오늘 교통정리를 맡았거든요. 지금은 전선 까기 작업 중이고요.”

“학원은 어쩌고요?”

“진작에 그만뒀어요.”

“이제 뭐 하시려고요?”

“다른 일 좀 해보려고요.”     


글 쓴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말한 뒤에 어색한 침묵을 몇 번 경험하고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낫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잘하셔서 보기 좋았는데 왜요? 계속 좀 해보시지. 어쩌다 그러셨데...”

사장님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힘을 주면 안 돼요. 처음에 물고 그다음에는 힘을 빼고 밀어줘야 한다고요.”

하지만 뺀치로 전선을 까는 시범을 보일 때는 엄격한 선생님 얼굴로 변했다. 

    

점심은 햄버거를 길에 펴놓고 먹었다. 식당 가서 먹자고 했지만, 사장님은 오전에 나사가 없어서 작업이 지체된 것 때문에 빨리 먹고 마무리해야 한다고 했다. 모내기하다가 논두렁에서 막걸리를 먹은 적은 없지만, 그 비슷한 기분으로 나는 콜라를 마셨다.     


“원장님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죠?”

“44살요.”

“학원 시작할 때 30대 초반쯤 됐죠?”

“네.”

“그때 참 미인이셨는데...”     


이번에도 사장님은 진심으로 딱하다는 얼굴이어서 나는 나의 노화에 대해 사과해야 하나 잠시 고민해야 했다.     

무언가 사라졌을 때 제대로 가치를 알게 되는 걸까. 학원을 그만두고 내가 생존하는데 필요한 돈이 얼마인지 처음으로 생각해봤다. 일도 마찬가지. 25세부터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했지만, 무슨 일을 어느 정도 해야 하는지 스스로 질문해본 적이 없었다.      


일과 돈이 없다면, 에서 출발하면 꼭 필요한 것부터 채워 조금은 가볍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나한테 맞는 좌표를 설정해서 내 앞에 놓인 망망대해 같은 삶을 항해할 수 있을까? 

     

나는 교통정리와 전선 까기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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