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행복이 있는 섬 '돈없이도' 03
초밥이가 킥복싱을 배울 때 나도 두 달쯤 같이 다녔는데, 20대 남자 코치는 초밥이한테는 이름을 부르면서 나한테는 꼬박꼬박 “어머님”이라고 불렀다.
“초밥아 너는 이거 하고 있어. (자못 경직된 얼굴로) 어머님은 제가 하는 걸 보세요, 어머님, 그게 아니고요, 어머님, 잘하시네요.”
이런 식이었다. 어머님으로 시작되는 말 때문에 운동을 마칠 때쯤 나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에게도 이름이 있다는 걸 그분께 알려드리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말았다. 나는 초밥이를 낳았을 뿐인데 마치 이 시대의 어머니라도 된 기분으로 도장을 나섰던 기억이다.
‘어머님’을 받아들이는 순간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고무장갑을 끼지 않고 설거지를 끝내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쌀을 씻고 감자와 계란을 삶았다. 컴컴한데 눈을 껌뻑거리며 계란 껍데기를 벗기고 마약 계란장을 만드는데 간장과 물을 대충 감으로 콸콸콸 붓다가 불현듯 내 안에 충만한 어머님으로서의 자신감을 발견했다.
수업 시작 전에 집 정리를 하고 간식을 만들 생각에 마음이 바빠 불도 켜지 못했지만, 학교에서 돌아와 허겁지겁 감자를 욱여넣고 마약 계란장에 밥을 비벼먹을 새끼 생각에 어미 마음을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어차피 흙으로 돌아갈 몸은 아껴서 뭐하나, 고무장갑이 거추장스럽고 시금치 한 줌 무치는데 위생장갑이 가당키나 하냐며 맨손으로 나물을 무친 지 오래다.
내가 어머님이란 호칭에 서운했던 이유는 중년 여성을 뜻하는 아줌마와 동일 개념이기 때문이지만, 아줌마가 되는 때는 내 몸보다 가족, 나아가 지구를 생각하는 때가 아닌가 하는 깨달음을 얻고 나자 흡족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가족에게 무좀이라도 옮길세라 양말에 샌들을 신는 패션이 이제야 납득이 되었다.
토요일 오전 수업이 학생들의 사정으로 취소가 되었다. 마침 비가 왔고 거실에 앉아 비가 내리는 걸 보고 있자니 빗물이 새어들 듯 과거의 기억에 젖어들었다.
그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빗방울이 맺히는 걸 보고 있으면 차 안 공기는 함께 보낼 시간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첫 번째 데이트로 영화관을 갔을 때, 잔뜩 긴장해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내게 그가 슬그머니 팝콘을 입에 넣어줬다. 입술에 닿았던 그의 손가락의 감촉이 영화 보는 내내 지워지지 않아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던 시간이 내게도 있었다. 있었나? 확실하지는 않다.
“커피 마셔야지?”하면서 빗속에 뛰어나가 커피를 사 오는 남자는 없지만 튼튼한 두 다리가 있는 나는 운동화 끈을 조여매고 나가 커피와 빵을 사 왔다. 고무장갑도 거부하는 기능성만 남아있는 내 손으로 빵을 뜯어먹으며 이 순간도 언젠가 기억될 순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제철 음식처럼 시기마다 사는 맛도 다르다. ‘돈없이도’에서는 흘러간 시간을 그리워하기보다 오늘의 즐거움을 발견하기를 권장한다. 요즘 내가 재미를 보고 있는 것을 하나 소개하자면, 당근에서 산 로봇청소기다. (지난 글에서 로봇청소기가 언제부터 필수품이 되었냐며 개탄했던 일은 잊어주시길.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함부로 장담 같은 걸 하면 안 되더라고요)
로봇청소기 덕분에 이제 바닥 청소를 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무엇보다 침대 아래 숨는 걸 좋아하는 보미가 먼지를 먹을까 봐 늘 걱정했는데 로봇청소기가 근심까지 말끔히 없애주었다. 스스로 본체에 가서 충전을 하고 “청소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며 나설 때 이 아이(로봇청소기)에게 나는 책임감을 배웠고, 장애물이 있어도 구석에 갇혀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투지는 가히 본받을 만 것이었다.
우리 집에 온 아이(로봇청소기)는 지나치게 완벽해서 자꾸만 청소를 덜 마쳤다며 내가 외출하고 돌아오면 청소하다가 구석에 박혀있고는 했다. 이놈의 집구석은 청소를 해도 해도 끝이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작은 감동을 받았고 버둥거리며 나를 기다렸을 아이를 살며시 들어 올려 본체에 데려다 놓았다.
오직 보미만이 자신의 폐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로봇청소기를 못마땅해했다. 겨우 쉬고 있는 아이를 보미가 앞발로 건드리고 위에 올라가는 걸 목격한 나는 “보미!”하면서 전에 없이 큰소리로 제재했다. 아프기라도(고장 나기도) 하는 날에는 다시 걸레를 쥐어야 하는 나에게 로봇청소기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로봇청소기가 주는 여유에 대해 유리공방 <빼다지> 채 사장에게 이야기했더니 채사장이 말했다.
“바닥에 있는 걸 다 치워야 해서 생각보다 편하지 않다던데요?”
“50만 원 주고 사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당근에서 65,000원에 샀다면 그저 감사하기만 해요. 바로 기대치의 차이죠.”
채사장은 맞네, 그렇네, 기대치가 낮으니까 하며 맞장구를 쳤다.
최근에는 자전거로 운동을 해볼까 해서 관심 키워드로 ‘실내 자전거’를 등록했는데 주로 주말에 물건이 많이 올라왔다.
“운동하려고 샀는데 역시 안 하게 되네요. 필요하신 분께 저렴하게 내놓습니다.”
문득 삶도 당근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 시절 열정을 불태웠지만 사그라들면 미련 없이 다른 이에게 양도하고 다른 불씨를 찾아 나설 수 있다면, 진입장벽이 낮아서 결심과 다른 선택을 하기도 수월했으면 좋겠다. 한때 절실했던 대상에게 들인 시간과 노력을 후회하지 않기를. 당근이 있으니까. 곁에 있어도 방치되어 먼지만 쌓아가기보다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과 힘차게 페달을 돌리며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빌어주기를. 당근이 있으니까. 한 방울의 눈물은 조미료 같은 거라 생각하고.
다채로운 즐거움을 누리려면 지난 키워드는 삭제하고 지금의 키워드에 집중해야 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래 완료’가 되어버릴지 모르니까. 다시 오지 않을 중년을 통과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