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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Jan 09. 2022

두부와 계란은 좋은 걸로

<여보, 나 제주에서 한 달만 살다 올게>를 읽고

“사실 나는 뚜렷한 주제를 가지고 쓰는 글이 오히려 힘들다. 목적이 너무 분명한 글은 금방 재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책<여보, 나 제주에서 한 달만 살다 올게>에서 편성준 작가가 한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있자니 개인적인 사소한 얘기도 써도 괜찮다고 등을 두드려주는 것 같았다.

    

어제도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이 되어서 보험회사에 긴급출동 서비스를 세 번이나(!) 부른 이야기를 쓰다가(1시간 정도 시동을 켜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두 번이나 시동을 꺼버렸다) 나한테는 어이없고 황당한 일이지만 남들은 관심을 없을 거라는 생각에 쓰다가 그만뒀다.    

  

때로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노화, 행복)에 대해 메모장에 글감을 모아서 힘겹게 한 편을 쓰고 나면 뿌듯하기도 하지만 다음에 글을 쓰는 게 겁이 났다. 쓰는 사람이 즐거워야 읽는 사람도 즐겁지 않을까. 오래 쓰려면 즐기며 쓰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아내인 윤혜자 작가가 남편이 집안일을 하는 걸 열거한 뒤에 “남편은 여러모로 좋다”라고 평을 한 걸 보고 청소기 같은 가전제품이 좋다고 하는 것 같아서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사랑꾼”면모도 있었다.


“연인에 대한 로망은 이런 것이었다. 아무 때나 전화를 하고, 원하면 당장이라도 만나자고 조르고, 그래도 흉이 되지 않으며 자존심 상하지 않는 그런 관계.”

아내는 그런 사람이 남편이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 내가 말 시킬까 봐 인상을 쓰고 있는 초밥이가 생각나서 나는 조금 슬퍼졌다.


퇴사하고 시간을 자유롭게 쓰면서 책을 마음껏 읽고 일하고 싶은 시간에 일하는 건 좋지만 착실하게 나가는 돈 때문에 고민하고 어떤 날은 잠을 설치기도 하는 작가의 모습이 나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건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을까. 


학원인 시절,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지만 퇴원생이 연달아 나올 때 불안으로 잠을 설쳤고 직원이 그만둘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내가 하는 고민(딱 100만 원만 더 벌었으면 좋겠다, 누가 글만 쓰라고 돈을 줬으면 좋겠다) 같은 허무맹랑한 꿈이 이루어져도 또 다른 고민이 찾아올 거라는 걸 안다. 지난번에도 어찌어찌 견뎌왔잖아, 이번에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무책임 하지만 대범한 마음이 생기는 이유다.


한참 돈이 궁할 때는 두부도 싼 걸 골랐지만 지금은 두부와 계란은 좋은 걸 산다. 이런 건 아껴봐야 티도 안 나면서 마음만 추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맛은 큰 차이가 있다. 


몸 편하자고 외식하면 마음이 불편하다는 걸 알았고, 그럴 바에는 좋은 재료로 건강하게 먹자고 마음먹었다. 

사실 비싼 음식이 아니라면 장보는 돈이나 비슷하지만 건강한 쪽을 택하는 거다. 외식은 한 번만 좋지만 귤을 제일 좋은 걸로 한 박스 사면 까먹는 100번이 행복하고, 계란 한 판이면 30번이 행복하다. '행복은 빈도'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 수 없다.


산에 다녀와서 샤워하고 온수매트 온도를 최고로 하고 누웠는데도 하체가 마비된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던 날이 있었다. 하루 종일 에너지를 소비해서 뭔가로 뱃속을 채우고 싶었다. 버터에 양배추와 밥을 볶아서 김치랑 먹어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때 초밥이가 들어왔다.   


“짜장면 먹을래?”

“어.”

그냥 던진 말이었는데 이제 도로 주워 담을 수 없게 되었다. 자주 시켜먹지 않아서겠지만 요새 초밥이는 '배달음식이라면 뭐든 좋아주의자'가 되었다. 하지만 짬뽕은 다 식은 데다 오징어가 오래된 건지 국물은 비릿했고, 포장용기와 몇 번이나 둘둘 감은 랩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나는 반도 못 먹고 음식을 버리고 포장용기는 식당에 가져다주려고 깨끗하게 씻었다. 마트나 식당에 포장용기를 가져가면 재사용하는 곳도 있기 때문이다.


열흘에 한번 정도 꽃을 산다. 오픈 박스에서 파는 만 원짜리 꽃이지만 꽃아 두는 동안 만족감은 십만 원은 족히 된다. 돈이 없어도 누릴 수 있는 건 얼마든지 있다(발견하는 족족 알려드리겠습니다).

가격과 상관없이 충분히 만족스러운 꽃


아내는 서울에서, 남편은 제주에서 술 마시는 내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한 이 책에서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누구나 은퇴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해야 하는 시기가 올 텐데 나는 그걸 미리 준비하고 있다고. 궁하면 땅이라도 파게 되어있고 어떻게든 먹고사는 길을 찾지 않을까 싶다. 반갑지는 않지만 생계의 불안이야말로 강력한 추동력이니까. 적게 소비하고도 부족함 없이 사는 방법을 터득하는 중이라고 믿고 싶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다 알 것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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