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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Jan 03. 2024

두 입은 선 넘지

초밥이와 여행을 가던 날, 맥도널드부터 들렀다. 우리는 같이 멀리 갈 때면 햄버거를 먹으면서 가는 게 습관 이어서다. 초밥이는 상하이버거세트를 골랐고, 나는 햄버거는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라떼만 주문했다. 그런데 초밥이가 먹는 걸 보고 탐나서 한입 얻어먹었더니 엄청 맛있는 거다. 맥도널드로 다시 차를 돌릴 뻔했다. 맨날 무조림 같은 것만 먹었더니 요 건강하지 않은 맛이 무슨 별천지 같았다. 한 입만 더 달라고 했더니 초밥이가 정색했다.     


초밥: 두 입은 선 넘지.     




우리는 숙소에 들어가면서 근처에 있는 농협마트에서 방어회와 알탕재료를 사 왔다. 숙소는 아궁이에 불을 때 주는 황토방이었다. 나는 밥을 하면서 “집에 있을 때랑 똑같잖아”라고 했고, 밥을 먹을 때도 집에서와 똑같았다. 장소만 옮긴 것 같았다. 

 

나: 못 생기게 해 봐. 엄마 예뻐 보이게.

밥 먹기 전에 내가 사진을 찍으면서 주문했더니 초밥이가 뒤에서 눈에 흰자만 보이게 하고, 사팔뜨기를 하는 등 깨알표정을 지었다. 같이 사진을 보고 웃었지만 곧바로 정적이 찾아왔다.     


밥을 다 먹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둘 중 한 명이 빵이나 과일을 가져오면 “나도”하고 같이 먹고 다시 무료해졌다.

     

나: 진짜 심심하다. 그지? 

초밥: 나는 애들하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초밥이는 휴대폰을 하고 있었다)

나: 지금부터 휴대폰 금지야!

초밥: 싫어.     


나는 아, 싫구나, 그랬다. 초밥이가 싫다고 하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집이라면 글을 쓰던가 책을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서점이나 도서관을 갔을 텐데 노트북도 없고, 가지고 온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산책을 가자고 했더니 초밥이가 "싫어!"라고 해서 아, 싫구나, 하고 주저앉았다. 할 일이 없는 이 상황이 낯설었다. 해야 할 일이 사라진 진공 상태에 있는 기분이었다.     


초밥이가 텔레비전을 켜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나: 좀 천천히 돌려봐. 뭐 하는지 안보이잖아.

초밥: 할머니도 맨날 그러는데.

나:...     


초밥이가 <고딩엄빠>에 채널을 고정시켰다. 출연자는 16살에 임신을 했는데, 아버지가 아이와 남자친구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출연자는 아빠와 이혼 후 혼자 살고 있는 엄마를 찾아가서 아이를 낳았는데 아버지가 그곳까지 찾아와서 또 아이와 남자친구 중에 선택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출연자는 엄마한테까지 피해가 갈까 봐 아버지를 따라나섰는데, 사연을 들어보니 오랫동안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해와서 공포와 무력감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초밥: 엄마는 내가 16살에 임신하면 어떡할 거야?

나: 얼마나 무섭겠어.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거야.  

초밥: 아...

나: 아이가 그런 선택을 했을 때는 부모가 준 영향이 있을 거야. 의지할 데가 필요했을 수 있고. 그러니까 부모가 힘들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게 맞아.     


순간순간 웃기고 화기애애하고 뭉클했지만, 전반적으로 심심하고 따분했다. 나한테는 가족여행이란 재미없는 거라는 걸 알게 한 계기가 되었고, ‘효도관광’으로 마음을 비운 초밥이조차 예상보다 재미없어서 놀란 시간이었다. 


우리는 죽이 잘 맞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랬을까 생각해 봤다. 우리는 평소에는 잠깐씩 만나서 재미있었지만, 여행에서 내내 같이 있다 보니 그렇게까지 할 말이 많지 않다는 걸 알았다. 가족끼리는 분위기가 처지지 않게 애써 할 말을 찾지 않는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늘어져 있다가 밥 먹을 때 잠깐, 얘기할 때 잠깐, 사진 찍을 때 잠깐 웃고 다시 늘어져있는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불안했고, 그걸 통해 내가 일상에서 생각보다 긴장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어쩌면 초밥이도 내가 모르는 긴장과 불안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가 함께할 때만이라도 느슨하게 풀어져 있어도 좋겠다. 좀 심심하더라도. 



장소만 바뀐 식탁



추신: 연재가 쉽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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