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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Dec 29. 2023

딸과 함께 지리산 일출

나만의 지리산, 나만의 희로애락

나: 12월 31일에 지리산 대피소에서 자는 거 어때? 1월 1일 일출을 지리산에서 보는 거지.

초밥: 그.... 래

나: 우왕! 진짜? 예약한다!     


이렇게 약속을 한 게 12월 초였다. 등산은커녕 호수공원을 걷자고 해도 늘 “놉”이라고 하는 초밥이가 웬일로 승낙을 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마지막이니까”라고 했다. 기세를 몰아 “지리산 종주는 안되지?”했더니 초밥이가 화를 냈다. 지리산 종주는 언감생심 한번 찔러봤고 나는 신나서 계획을 세웠다.   

  

지리산에는 총 7개의 대피소가 있는데 그중 나는 연하천 대피소를 예약했다. 한 해의 마지막 밤을 지리산에서 보내고, 1월 1월 일출을 형제봉에서 볼 생각이었다. 천왕봉 바로 아래에 있는 장터목대피소에서 자고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고 싶기도 했지만, 날이 날이니만큼 사람들로 북적일 것 같아서 조용히 새해를 맞는 데는 나의 계획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연하천 대피소는 성삼재휴게소에서 노고단 고개를 지나 13km 정도만 가면 나온다. 가는 길이 오솔길 같아서 평소에 등산을 하지 않은 초밥이도 무리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문제는 성산재 휴게소까지 어떻게 가느냐였다. 차를 가지고 가면 편하지만, 겨울에는 성삼재휴게소까지 가는 도로가 결빙으로 통행제한을 해서 당일 상황을 봐야 한다. 기차를 타고 구례구역에서부터 택시로 이동하는 방법도 있지만, 통행제한을 한다면 택시도 못 가니까 가는 데까지 가서 거기서부터 걸어가야 한다. 7년 전 나도 성삼재에서 2km 아래에 있는 시암재에서 택시에서 내려 걸어갔다.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자 초밥이가 “얼마나 걸어야 돼? 힘들어?” 이런 불안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 가지 작전을 더 세워서 초밥이한테 톡으로 보내주었다.    

 

1. 

첫날:성삼재~연하천대피소(12.9km)

둘째 날: 연하천대피소~형제봉~연하천대피소~성삼재(16km)     

(난이도 하)     


2.

첫날: 음정~연하천 대피소(7.3km)

둘째 날: 연하천 대피소~형제봉~음정(10.3km)     

(난이도 중)     


나: 1안은 13km이지만 길이 좋아. 한 시간에 3km쯤 가니까 네다섯 시간이면 도착해.

초밥: 뭐? 네다섯 시간이나 걷는다고? 나는 그렇게 오래 못 걸어. 엄마가 초보자코스를 정했어야지. 나 못해.

나: 안 해봐서 그래. 진짜 힘들지 않은 코스야.

초밥: 힘들면 택시 타고 가버릴 거야!

나: 지리산에서 카카오 택시 부르게? 네가 원하면 언제든 내려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도 초밥이는 마음이 안 놓이는 모양이었다. 간다고는 했지만 사실 등산자체가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고민하다가 나는 학교 학생들과 방학마다 지리산종주를 해온 지선생님에게 자문을 구하기로 했다. 내 계획을 들은 지선생님이 대번에 이렇게 말했다.     


“엄마 욕심이지, 등산을 안 해본 애를 안돼. 더구나 겨울산은 위험해서 안돼.”     


지선생님은 학생들과 지리산 종주를 가기 전에 서천 근처에 있는 천방산, 희리산을 오르면서 체력테스트를 한 후 갈 수 있을 만한 학생들만 참여시켰다고 했다. 특히 겨울은 눈 때문에 아이젠을 하고 걸으면 체력소모가 큰 데다 침낭과 옷 때문에 짐이 무거워서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다. 더구나 연하천 대피소는 바닥 난방이 안되어서 침낭을 두꺼운 걸로 가져가야 한다고 했다. (벽소령 대피소는 전기패널로 바닥 난방이 된다)     


“꼭 지리산을 가야 해?”

지선생님이 물었다. 초밥이도 같은 질문을 했다.    

 

“왜 지리산인데?”  

   

연하천 대피소는 내가 산에서 처음 자본 곳이다. 또 형제봉은 내가 난생처음 산에서 일출을 본 봉우리다. 낮은 곳에서 떠오르는 태양에서 온 세상을 품을 만큼의 커다란 기운을 느꼈고, 내가 아주 작은 존재임을 알게 했다. 그건 나에게 뜻밖의 위로가 되었다. 나에게 일어난 일 중에 내가 끼친 영향은 얼마나 될까. 애초부터 이 결과에 이르게 할 능력이 내게 없었던 게 아닐까. 나라는 인간이 생겨나는 일부터 한국이라는 나라, 고향인 대구, 부모님까지 자연이 만들어낸 우연이 거의 모든 일을 만들었으니까. 그걸 깨닫고 나자 아니, 느끼고 나자 그동안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는 것 같았다.      


이제야 아무것도 아닌 나, 미미한 존재인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 평가하는 일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는데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계속 산에 갔다. 


욕심을 부리자면 내가 초밥이한테 주고 싶은 것도 이것이다.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초밥이를 보자고. 내가 그런 사람이 돼주자고. 세상에 그렇게 봐주는 사람이 딱 한 사람이 있다면 초밥이한테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게 얼마나 커다란 위안이 되는지 알았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하는데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간신히 참아가며 말했다. 그런데 하... 초밥이는 듣고 있지 않았다. 내 이야기는 손을 흔들며 산너머로 떠나가버렸다.     


결국 나는 모든 계획을 없었던 걸로 하고 펜션을 예약했다.     


“울어? 대피소보다 재미있을 거야. 우리 기분 좋게 다녀오자.”     

초밥이가 내 등을 두들기며 말했다.          


승낙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나만의 지리산, 나만의 희로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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