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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Jan 17. 2024

연애 가이드라인

오늘은 엄마가 28살에 만났던 남자 얘기를 해줄게. 그 사람과 나는 서로 첫눈에 마음에 들어서 두 달을 거의 매일 만났어.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전화를 했는데 그 사람이 전화를 받지 않는 거야. 처음에는 무슨 사고라도 났나 걱정했지.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었고, 그리고 나서야 알았지. 그 사람이 연락을 끊었다는 걸.     


문제는 그 이후로 엄마가 밥도 못 먹고 잠도 자지 못했다는 거야.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을 그렇게 사랑했냐 하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랬을까. 엄마는 있잖아, 28살이라는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다? 이제 이 남자한테 정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거야. 잘생긴 얼굴에 BMW 7시리즈를 타는 이 남자를 놓치면 앞으로 다시 이런 남자를 만날 기회는 없을 거라고 판단한 거지. 그 남자도 아마 그런 엄마의 검은 속셈을 눈치채고 도망간 건지 몰라. 하.      


아무튼 혼자서 그렸던 핑크빛 미래가 산산이 부서지고, 초췌한 몰골로 학원에 출근하던 어느 날, 문제의 그 남자한테서 전화가 왔어.     


“나는 독신주의자인데 너는 당장이라도 결혼할 것처럼 굴더라. 그게 부담이 됐어.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나는 여자를 만나다가도 일이 바쁘면 연락을 끊었다가 한가해지면 다른 여자를 만나는 짧은 연애만 해왔어. 그런데 너한테 다시 전화한 이유는 보통 이렇게 헤어지면 생각이 안 나는데 이번에는 좀 다른 것 같아서 말이야. 일방적으로 연락 끊은 건 미안한데 너만 괜찮으면 다시 만나고 싶어. 이 감정이 뭔지 나도 한번 확인해봐야 할 것 같거든.”     


뭐 이런 인간이 있나,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를 해도 모자랄 판에 한 달 만에 전화해서 한다는 소리가 자기감정을 확인해야 하니까 다시 만나자니. 그 사람이 말하는 걸 듣는 중에도 너무 화가 나서 욕을 한 바가지 해주고 끊고 싶었거든? 그런데 엄마가 뭐랬는 줄 알아? 알았다고 했어.    


지금도 엄마 성질 머리가 이런데 이십 대 때는 오죽했겠냐. 오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어. 그렇게 폐인처럼 지내면서도 엄마는 그 남자한테 처음 딱 한 번 전화를 걸고 하지 않았어. 전화할 마음만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는 게 남자라는 동물이야. 그런데도 하지 않는다면 이유는 두 가지지. 다른 여자가 생겼거나 나한테 마음이 없거나.     


다시 만나보니 그제야 제대로 보이더라. 내가 이런 남자 때문에 한 달 동안 잠을 못 잤나 억울할 지경이었지. 곧바로 나는 이별을 고했고 다시 그 남자를 생각하지 않았어.     


이 일이 있은 후 자칫해서 결혼까지 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어. 연애는 몰라도 결혼이라는 중차대한 일을 감정에 휩쓸려서 결정하면 안 되겠다는 현명한 결론에 이른 나는 결혼정보업체에 가입했지. 결혼할 준비가 된 사람이 서로 이성적으로 따져보고 결혼한다, 이 얼마나 합리적인 방식이냔 말이지.     


일단 오늘은 엄마가 결혼정보업체에 가입한 계기까지만 말할게. 엄마도 그때는 맞다고 생각한 게 지금에 와서는 왜 틀린 게 돼버렸는지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거든. 


그건 그렇고, 엄마가 다시 연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가이드라인을 한번 만들어봤어. 애정을 가지고 한번 봐줄래? 일단 삼단계로 나눠봤어.


1. 가볍게 만나는 관계

2. 정신적으로 교류하는 관계

3. 결혼 혹은 동거 (살림 합치기)     


일단 엄마는 1단계 가볍게 만나는 것만 할 거야. 가벼운 만남으로 그칠 수도 있고 감정이 커질 수도 있겠지. 만나기 전부터 2단계 정신적 교류나 3단계 결혼은 생각도 하지 않을 거야. 마음이 동하기만 한다면 바다같은 넓은 품으로 다 만나볼 거야. 열일곱 살 연상이어도 괜찮고 열일곱 살 연하면 더 좋아. 아무것도 따지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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