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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Feb 13. 2024

승무원, 내가 원했지만 하지 못한 일

후회가 탐구가 될 때

엄마가 글을 쓰기 시작한 지 5년이 되었잖아. 예전에 썼던 글을 읽어보면 그 글을 썼던 내가 보인다? 그때 나는 이 일을 이렇게 바라봤구나, 하나의 감정이 커서 다른 걸 볼 수 없었구나, 이제 그 감정에서 조금 헤어 나왔구나 하고 말이야. 그게 참 재미있는 것 같아. 그러다 보면 글을 쓰는 중에도 나를 관찰하는 기분이 들어.     


사건과 상황은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닌 것 같아. 내가 경험한 이 일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르게 해석될 거라는 걸 아니까 점차 상황보다 그걸 바라보는 나한테 집중하게 되는 것 같아.      


남과 비교해서 이런저런 선택을 했던 이십 대를 돌이켜보면 글쓰기처럼 나를 관찰할 수 있는 일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기기도 해.     


엄마가 승무원시험을 본 적 있다고 한 거 기억나? 23살의 엄마는 국내 한 항공사 모집 공고에 원서를 냈어. 면접장인 대구의 한 대학교에 갔더니 커다란 강의실에 한 이백 명쯤 되는 내 또래의 여성들이 무릎까지 오는 검은색 치마, 흰색 블라우스, 뒤로 동그랗게 묶은 머리를 하고 있는 거야. 엄마도 그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지. 같은 모습을 한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있는 장면은 꽤나 인상적이어서 그 속에 들어가 빈자리를 찾아 앉을 때 낯설었던 감정이 지금도 기억나.    

 

면접은 7명이 한 조가 되어 면접관 앞에 일렬로 서서 한 명씩 질문을 받는 형식이었어. 나한테도 뭔가를 물었는데 그건 잊어버렸고, 순서대로 하는 질문이 끝나고 한 면접관이 나에게 앞으로 나와보라고 하더니 뒤돌아보라고 했어. 그리고 두 손을 펴서 보여달라고도 했어. 나는 시키는 대로 했고 “됐어요. 들어가세요”라는 말을 듣고 내 자리로 돌아갔어. 그렇게 들어왔던 문으로 다시 나가는데 그 면접관이 뒤에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   

  

“김준정씨, 8월 졸업이네요. 이번에는 2월 졸업예정자를 뽑으니까 다음에 다시 응시하세요.”     


엄마가 한 학기 휴학을 해서 졸업도 한 학기 늦었거든. 면접을 봤을 때는 졸업이 일 년이 남았을 때였어. 나는 그렇구나 하고 다음에 내야겠다고 마음을 편하게 먹었던 것 같아.     


몇 달뒤 같은 항공사에 원서를 쓰는데 문제가 생겼어. 학점을 넣는 칸에 말이야, 2.5부터 입력할 수 있는 거야. 전에는 어떻게 했냐고? 그때는 종이 원서에 수기로 기입해서 우편으로 보냈던가 아마 그랬을 거야. 아무튼 그게 왜 문제냐고?      


그건 바로 엄마 학점이 2.25였기 때문이야. 너는 아직 중졸이라 모르겠지만 말이야, 4.3 만점에 2.25라는 학점은 시험만 못 친다고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야. 시험을 치지 않고, 리포트, 출결 등 전방위에 빵꾸가 나서 학점을 후하게 주는 마음씨 좋은 교수님한테조차 찍혀야 가능한 점수지. 그러니까 2.5는 커트라인이 아니라 이것도 안 되는 사람은 원서자체를 내지 말라는 뜻이었을 거야. 결국 엄마는 국내 항공사 두 군데에 원서도 넣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어.     


그 후 외국 항공사라도 원서를 내보려고 했지만 그러려면 잉글리시라는 나에게는 너무나 높은 벽을 넘어야 했어. 토익과 회화 학원에 등록했지만, 그것도 술 먹고 노느라 결석을 밥먹듯이 하다가 흐지부지 되었어. 대기업은 응시만 했다 하면 1차에서 모조리 떨어지고. 그게 23살, 24살의 엄마였어.    

 

승무원 시험에 떨어지고 나니까 그게 간절한 무엇이 돼버리더라. 드라마를 보다가 승무원이 나오면 얼굴이 벌게져서 채널을 돌려버렸어. 한 번은 썸 타던 남자와 친구 커플을 만나게 되었는데, 친구의 여자친구가 승무원이라고 하는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데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 그래서 화장실을 간다고 하고 집에 와버린 일도 있었어. 그렇게 승무원은 오랫동안 내가 원했지만 하지 못한 일로 남아있었어.     


그랬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면 승무원이 나한테 맞는 일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 엄마는 같은 업무를 반복적으로 하기보다 발상, 기획하는 일이 더 맞거든. 내가 기획하고 주도하는 게 좋아. 요리를 좋아하는 것도 그런 성향 때문인 것 같아. 두부조림을 하다가 찌개 육수를 한 국자 넣는다거나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보고 메뉴를 정하고, 나의 계획대로 물 흐르듯이 진행되는 게 즐거워.     


10개월이지만 모발화장품 회사를 다닐 때 상사들 눈치를 봐야 하는 조직 생활보다 내 수업만 충실하면 되는 학원 강사가 나한테 더 맞다고 느꼈어. 승무원 업무가 나의 특성과 맞는지 따져보지 않고, 아니 나의 성향을 알려고 하지 않은 채, 남들이 선망하는 직업이니까 나도 원한다고 믿어버린 게 아닐까.     


승무원시험에 떨어진 일을 두고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어. 내가 디지털의 시대로 가는 과도기의 피해자라던가, 한 학기 휴학을 하지 않았더라면 처음 응시했을 때 합격했을 거라는 식으로 말이야. 현재의 불만족스러운 부분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아 합리화할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것도 필요할 수 있어. 그렇게 위안하면서 살아갈 힘을 얻는 것도 괜찮잖아.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내가 위안을 삼고 있다는 건 알고 싶어. 글쓰기는 그런 나를 보게 해 줬어. 후회가 탐구와 공부가 되도록 해줬어. 여기까지가 다라고 생각했는데 여기가 다가 아니라는 걸 알게 했어. 내가 가진 여러 가지 모습 중에 엄마는 글을 쓸 때의 나로 살고 싶어. 관찰하고 공부하면서.          

설연휴, 아침 산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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