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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고추에서 청양고추로 가는 길

by 김준정 Jan 04. 2025

내가 단골로 가는 순대국밥집은 두 종류의 고추를 내어준다. 오이고추와 청양고추다. 오이고추는 크고 청양고추는 작아서 눈으로 구분이 가능하지만, 세심한 주인은 청양고추를 꼭지를 따서 준다.    

  

초밥이와 둘이 갔을 때다. 내가 맨밥에다 청양고추를 베어 먹는 걸 보고 초밥이가 물었다.     


“그거 매워?”

“아니, 별로 안 매워.”   

  

내 말을 듣고 초밥이는 비장하게 청양고추를 쌈장에 찍어 왼손에 들었다. 오른손으로 밥을 크게 떠서 입에 넣고 심호흡을 한 후 고추를 노려봤다. 막상 고추가 입에 들어올 때는 입을 오므려 앞니로 소심하게 잘라먹었다. 몇 번 신중하게 씹더니 말했다.   

  

“괜찮네. 안 맵네.”     


녀석은 그러면서 더 먹지 않고 고추를 내려놓았다. 얼굴이 벌게진 채로 말하는 녀석이 귀여웠지만, 귀여워하면 발끈하기 때문에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펄펄 끓는 순대국밥이 나왔다.     


“먼저 고기를 식으라고 건져놔.”


나는 밥뚜껑에 순대와 머리 고기를 덜어놓으며 말했다. 초밥이도 나를 따라서 고기를 따로 담았다.  

   

“밥은 안 말아?”

“그건 좀 있다가. 고기에 새우젓 하나씩 올려서 먹어. 이렇게.”


초밥이는 나를 따라서 새우젓 한 마리에 고기 한 점씩 먹었다.    

 

“이제 국이 식었으니까 밥을 말아. 남은 고기도 넣고.”   

  

초밥이한테 국밥 먹는 순서를 일러주고 있으니까 아주 오래 산 기분이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순대국밥 먹는 방법만큼은 딸한테 자신 있게 알려줄 수 있었다. 그간 내가 먹어온 순대국밥 그릇 수가 자신감을 주었다. 왼손을 옆자리 의자에 걸치고 다리를 꼰 채로 국물을 퍼먹는 내가 폼나게 느껴졌다.  

 

초밥이가 또다시 청양고추를 집어 들었는데, 내려놓을 때 보니 고추의 크기가 그대로였다.   


“매우면 오이고추 먹어.”

“아냐. 안 매워. 청양고추 맛있어서 먹는 거야.”    

 

아, 초밥이는 지금 오이고추에서 청양고추로 가는 길에 있구나. 오이고추는 심심하고 청양고추는 매울까 봐 긴장은 되지만 자꾸만 청양고추의 맛이 궁금한 시기.     


식당을 나와서 초밥이와 차를 타고 가다가 초밥이가 갓난쟁이였을 때 살던 아파트를 지나갔다.     


“너를 유모차에 태우고 예방접종을 맞으러 갈 때가 생각난다. 조용해서 잠들었나 하고 보면 생글거리면서 세상구경하던 니 얼굴이 떠오른다. 칭얼거리지도 않고, 눈만 마주쳐도 웃던 아기였는데.”


“엄마, 운전면허 언제 땄어? 차 언제부터 몰았어?”     


초밥이는 이제 오이고추 시절은 돌아보지 않는다. 앞으로 다가올 청양고추 시기에만 집중할 뿐이다.

줄지 않는 청양고추줄지 않는 청양고추
한 팔은 옆 의자에 걸치고 그릇은 받침대에 비스듬히 세우고한 팔은 옆 의자에 걸치고 그릇은 받침대에 비스듬히 세우고
꼭지를 딴 게 청양고추꼭지를 딴 게 청양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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