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희랍어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어쩌다 극단으로 분열된 정치로 이어졌는지 모르겠다.
“영남에 사는 사람들은 왜 그런 겁니까?”
독서모임에서 한 회원이 내가 대구에서 30년을 살았다고 하자 내게 한 질문이다. 질문을 듣고 설연휴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설을 앞둔 어느 날, 어지간해서는 멀리 가는 걸 피하는 아버지가 전화를 해서 설에 군산에 오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심장이 약해서 비행기는 위험하다며 계모임에서 가는 해외여행을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내가 그동안 낸 회비를 아깝다고 했더니 아버지는 꼭 가야 하는데도 아닌데 안 가도 그만이라고 했다. 여행은 굳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은 아쉽지 않다는 뜻이었다.
모든 일에 쓸모를 따지는 아버지가 직접 운전을 해서 우리 집에 오는 어려운 결정을 했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를 기분 좋게 해드리고 싶었다. 매끼 신경 써서 밥상을 차렸고, 식사 후에 늦은 밤까지 식탁에 남아 아버지 이야기를 들었다. 대구에 있는부모님 집에 가면 나는 밥을 먹고 나면 예전에 쓰던 방에 들어가서 책을 읽거나 잠을 잤지만, 부모님이 우리 집에 와있는 동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필요한 게 있어서 부를 수도 있고, 서운해할지 몰라서 내내 붙어있었다. 잘 때조차 방문을 조금 열어두었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아버지는 굳이 먹지 않아도 되고 심장에도 좋을 게 없는 반주도 드셨다. 첫날은 더덕구에다 매실주, 둘째 날은 갓 부친 전에다 칭다오, 셋째 날은 남은 전과 나물을 안주로 막걸리를 마셨다.
셋째 날 내가 상을 차리면서 막걸리를 꺼냈더니 아버지가 반색을 하며 “들어오다가 샀냐?”라고 했다. 같이 월명산을 가자고 했지만, 아버지가 날씨가 춥다고 거절을 해서 나와 엄마만 나갔다가 왔는데, 혼자 집에서 우리를 기다리면서 따분하셨던 모양이었다.
깊은 겨울밤 머리에 하얗게 눈이 내린 부모님과 중년이 된 딸이 마주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 우리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막상 집을 떠나니 아버지도 조금은 마음이 홀가분해진걸까. 77세가 되어도 그치지 않는 걱정이 늘 아버지 위에서 비처럼 내렸는데, 그때만큼은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밤 10시쯤 어머니는 자야겠다며 일어섰고, 아버지와 나는 12시까지 식탁에 남았있었다.
“무슨 남자가 저래 말이 많노.”
4일 밤을 그렇게 이야기를 했더니 어머니는 질렸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버지가 평소와 달리 여유롭고 흡족해하는 것 같아서 방심을 했나보다. 마지막 4일째 밤 그렇게도 조심했던 내란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내가 아버지와 다른 정당과 정치인을 지지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도 피했던 화제였을 거다. 그날은 윤석열 내란 수괴 피의자가 12월 3일 비상계엄을 한 지 57일이 되는 날이었다.
내가 전날까지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었던 건 얼마 전에 읽은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덕분이었다. 책의 한 구절을 속으로 염불처럼 외우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문장은 이것이었다.
“섬사람에게 해는 바다에서 떠서 바다로 지며, 산골 사람에게 해는 산봉우리에서 떠서 산봉우리로 지며, 서울 사람에게 있어서 해는 빌딩에서 떠서 빌딩으로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섬사람이 산골 사람을, 서울 사람이 섬사람을 설득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이 됩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수감자들이 우격다짐을 하는 것을 어리석게 보지 않고, 그들에게서 자신에게 없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확신이었다. 그런 확신은 지식인인 자신은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겸손하고 참신한 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 나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버지에게 이런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에게서 나에게 없는 것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사람의 낮은 마음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 공산주의자잖아. 지금은 평화로워져서 좋게 말할지 모르겠지만, 옛날에 공산주의가 얼마나 무서운 거였는지 아나?”
아버지와 내가 함께 갈 수 있는 제3의 안전지대인 줄 알고 이끈 땅에는 트라우마가 지뢰처럼 묻혀있었다.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아버지 입에서는 빨갱이, 좌파, 간첩이라는 말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월남참전유공자다. 월남전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이념을 내걸었지만 실상은 강대국의 이권다툼이었고, 가난한 나라의 청년에게는 먹고살기 위한 목숨을 건 선택이었다. 살길이 막막해서 남의 나라 전쟁터에 나갔던 사람에게 공산주의라는 것은 건드리면 터져버리는 폭탄 같은 것이다. 적어도 딸인 나는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다.
4박 5일을 함께 보내고 부모님을 배웅하면서 나는 아버지를 오래 안고 말했다.
"아빠, 미안해요."
가슴이 아려오면서도 복잡하고 징글징글했다. 가족이 뭔지...
한편 내가 사는 전라도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의 상처로 고통받는 이들이 많다. 그들에게 518 민주화운동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아픔이다. 나와 가까운 산우는 학생시위에 참여하다 수감되어서 고문을 당한 후유증이 있다. 같이 학생운동을 했던 동기와 후배, 선배들이 자살, 알코올중독, 병환 등의 소식을 듣는다고 했다. 한 인간이 국가폭력을 당하고 그걸 극복하고 살아가는 건 너무나 버거운 일이다. 젊은 시절에 불의를 참지 못해 겁 없이 뛰어든 자신을 원망하고 후회하다가 한편으로 비겁한 자신을 자책하는 일이 사는 동안 그분들을 괴롭히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면 지금의 정치양극화 현상은 트라우마와 트라우마의 충돌인 것 같다.
“영남에 사는 사람들은 왜 그런 겁니까?”라고 한 60대 회원은 광주시청 앞에서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희생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고, 친척들과 이웃이 피해자라고 했다. 그분에게 123 비상계엄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고, 그걸 옹호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환(幻)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
한강 소설 <희랍어 시간>에 나오는 보르헤스의 문장이다. 여기서 환은 환상, 허상을 뜻하는 한자로 각자 실제라고 느끼는 세계가 다르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았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어도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본다. 우리는 객관적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소설은 결핍을 통해서만 타인과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시력을 잃어 가는 남자와 알 수 없는 이유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된 여자가 소설에 등장하는데, 희랍어 강사인 남자가 계단에서 넘어지고 여자가 도와주게 되면서 그들은 오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보이지 않지만 여자가 옆에 있다는 걸 느끼고 남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여자는 대답은 하지 못하지만 들을 수는 있었다. 남자를 부축해서 집으로 오는 동안 여자는 남자에게 앞에 무엇이 있는지 설명을 해주지 못지만 무사히 집에 도착한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이겨낼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그때는 누구의 손이라도 잡아야 한다.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 도움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둘을 이어주고, 그제야 말을 하고 보게 된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죽은 언어인 희랍어를 배우는 것이 소통이 사라진 사회에서 타인과 연결되는 법을 배우는 걸 비유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