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작가의 사인에서 시작한 글

by 김준정

강연에서 김탁환 작가에게 한 청중이 질문을 했다.


“소설을 쓰기 전에 디테일한 부분까지 계획하고 쓰나요. 아니면 큰 줄거리만 짜고 집필에 들어가시나요?"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김탁환 작가는 짧게 답을 하고 이어서 설명했다.


“질문 하나를 정하는데 일 년씩 걸리기도 해요. <불멸의 이순신>을 쓰기 전에는 이순신 장군이 그 시대에 상식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싸운 이유가 궁금해서 기록을 찾아봤어요. 이순신 장군은 거의 준비병 환자 수준으로 돌다리를 100번을 두드리고 갈 정도로 준비가 철저했다고 해요. 그렇게 30년간 자신을 단련한 이순신은 결국 남들과 다른 전술과 전략을 펼칠 수 있었던 거예요.”


김탁환 작가는 이순신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바뀌었다고 했다. 장편소설을 쓸 때, 자료 조사와 준비를 더욱 치밀하게 하게 되었다고. “그렇게 안 하면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가지 못하고 중간에 빠져 죽어요”하고 웃었다.

이 이야기를 나는 2019년, 군산 한길문고 강연에서 들었다. 그날 김탁환 작가는 작가로 보낸 시간을 간략하게 들려주었는데, 처음 십 년간은 집필과 대학 교수 일을 병행했다고 했다. 그러다 마흔에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교수직을 포기하고 전업 작가의 길을 택했다.


“장편소설 작가는 체력이 중요해요. 내가 장편을 쓸 수 있는 나이는 60세까지라고 생각했어요. 앞으로 20년, 작가로 달려보겠다고 결심한 거죠. 그런데 장인어른은 아직도 저를 ‘김교수’라고 불러요. 학교에 안나간지가 언젠데. 하하하.”


감탁환 작가는 새벽 6시부터 오후 2시까지 A4 3장의 글을 쓴다고 했다. 글이 안 써질 때도 양을 채우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말에도 쉬지 않는다며 “내가 쉬면 등장 인물도 쉬거든요”라고 했다. 다음날 버리더라도 감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양을 채워서 쓰기를 하고 있다고.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김탁환 작가는 <가시리>를 집필 중이었다. 도저히 글을 쓸 수 없었던 그는 진도 팽목항으로 가서 희생자 가족들과 자원봉사자들을 만났다. 자신의 생계를 접고 희생자 가족들 옆에서 청소하고, 밥을 나누며 고통까지 나누고자 했던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자신의 생명까지 내놓고만 김관홍 잠수사를 만났다. 그 후 '좋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쓴 소설이 <이토록 고고한 연예>다.



*


이번 회차의 독서모임 책은 <이토록 고고한 연예>다. 모임날짜가 며칠 앞으로 다가와 나는 별생각 없이 책을 찾아서 펼쳤다.


“김준정 님 한없이 좋은 사람!”


김탁환 작가가 써준 문장이 언젠가 내가 다시 올 줄 알았다는 듯 반겨주었다. 주저 없이 써 내려간 힘 있는 필체에서 어떤 확신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다시 읽는 소설 속에는 나를 위해 쓴 것 같은 문장이 있었다.


“잔재주는 배우고 익히면 됩니다. 꼭 하고픈 이야기에 집중하는 능력, 그게 재담꾼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600쪽이 넘는 긴 소설의 도입 부분에서 달문은 모독으로부터 <구운몽> 이야기를 듣는다. 이야기가 끝나자 달문은 팔선녀를 만난 일이 꿈이었다는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돌연 역정을 낸다. “여덟 여인과 사랑을 나눈 게 뭐가 문제란 말입니까?”하면서 말이다. 꿈이라고 하면 그만이냐고, 꿈에서 깨면 예전과 같아지는 거냐고, 올해의 봄은 작년의 봄이 아니듯 같은 게 아니라고 했다.


"뒤늦게 깨어나면 뭘 하겠습니까? 욕심입니다 그건. 지금 누리는 행복보다 더 나은 행복이 있을 거라는 황당한 욕심!”


원하는 것을 한낱 꿈이었다고 하는 건 나약하다는 말일까. 가식이고 비겁하다는 뜻일까. 나는 달문이 역정을 내는 이유를 생각하다가 다시 책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쯤 후에 하나의 문장을 찾아냈다.


“평범한 날들이 쌓여 오늘 이 모양이 된 거니까요. 사람이 사람이 되고 삼이 삼이 되려면 특별함이라곤 전혀 없는 하루하루가 필요한 법입니다.”


강연을 들었던 때 나는 이제 막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였다. 김탁환 작가가 하는 이야기는 당시 나에게는 멀지만 다가가고 싶은 꿈같은 것이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한 사람의 용기 있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연재일이 되었는데 써놓은 글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이토록 고고한 연예>를 읽었다. 책 속에는 6년 전 어느 시간이 고여있었다. 휴대폰 메모장을 찾아보니 내가 강연 중에 쓴 메모와 한 편의 글로 쓴 후기가 있었다. 그 메모와 후기로 이 글을 썼다. 그랬더니 6년 동안 보낸 시간이 오늘 이 글을 완성하게 해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탁환 작가만큼은 아니지만, 주말을 빼고 하루 서너 시간씩 노트북 앞에 앉아있었으니 말이다.


소설의 제목이 왜 <이토록 고고한 연예>일까. 우아하고 근사하다는 뜻의 '고고한'과 대중을 상대로 펼치는 음악, 무용, 만담, 마술, 쇼 같은 '연예'로 된 모순된 제목이 소설을 세 번째로 읽고 나서야 궁금해진 거다. 고고함과 연예 사이, 꿈과 현실 사이를 채우고 있는 하루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제목과 소설이 시작한 질문을 머릿속으로 한참 궁굴리다가 이런 답을 내본다. 평범한 하루하루로 자신을 단련한 사람이 고고한, 그리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 하고.



KakaoTalk_20260420_143206705.jpg 한 면을 꽉 채운 대작가의 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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