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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을 정리하면 치킨값은 벌어요.

옷장을 정리하면 치킨값은 벌어요.

by 환오

전업주부의 삶은 수입이 없다는 전제 위에 세워진다.

따라서 나는 늘 지출을 억제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살았다.

남편이 대기업 과장으로 잘 나가던 시절에는 그 부담이 크지 않았다.

나름 알뜰하게 살림을 꾸리며 남은 돈은 은행에 차곡차곡 적금으로 부어 넣었다.


그러나 그 명함이 하루아침에 무력해진 순간, 내 마음은 쓰나미가 휩쓸고 간 듯 황량했다.

때때로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끝까지 버텨냈을 텐데’라는 오만한 생각이 치밀었지만, 퇴사를 후회하지 않는 남편의 태도 앞에서 나는 고개를 떨구며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두 아이를 키우는 형편에 오랜 시간을 밖에서 노동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결국 살 길은 부업밖에 없었다.

수백 번, 수천 번을 고민해도 결론은 도돌이표처럼 늘 제자리였다.


그 무렵, 지역 맘카페에서 우연히 본 글이 눈길을 끌었다.

“헌 옷 정리로 애들 과잣값은 벌었다”는 인증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후기를 남기면 업체에서 5천 원을 입금해 주는 이벤트도 있었다.

순간, 속에서 올레!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래, 이거라면 나도 할 수 있다.

곧장 안방 옆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옷장을 열자, 차마 버리지 못했던 옷들이 나를 맞았다.

검은색 반팔 원피스는 장례식장에 입을 거라며 남겨 두었고, 목까지 올라오는 두꺼운 스웨터는 한파가 찾아오면 입을 거라고 간직해 두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장례식장에 갈 나이는 아직 멀었고, 목이 조이는 스웨터는 불편해 손이 가지 않았다. 옷마다 이름표처럼 붙어 있는 사연들이 나를 붙잡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이름표를 떼어내기로 했다.


‘2년 넘게 입지 않은 옷은 버려야 한다’는 말을 떠올리며, 친정에서 얻어온 100리터짜리 봉투를 꺼냈다.

정리는 하루이틀에 끝나지 않았다. 아이가 자라 더 이상 물려줄 수 없는 작은 옷들, 남편이 몇 해째 손도 대지 않은 티셔츠들, 결혼 전 커리어우먼 시절 즐겨 입던 원피스들까지. 몇 달 동안 봉투는 하나둘 채워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손이 오래 머문 것은 원피스였다. 회사 다니던 시절, 야무진 얼굴로 사람들을 만나던 내가 입었던 옷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육아에 지쳐 편한 고무줄바지만 찾는다. 타이트한 원피스는커녕 심지어 청바지도 불편하다.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봉투는 어느새 세 개가 되었고, 마침내 맘카페에서 가장 후하게 쳐준다는 업체에 연락을 했다.


마지막으로 손에 쥔 것은 신혼 초, 시아버지가 선물해 주신 패딩이었다. 당시 오십만 원이 넘는 고가였고, 한때는 매일같이 입던 애착패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칠 년 넘게 옷장 속에 박제된 유물이 되어버렸다. 이사할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나 ‘너 아직도 있었니?’라는 물음이 올라오는 패딩. 버리고 싶어도 쉽게 버릴 수 없던 애증의 물건이었다.


시아버지는 사랑을 돈으로 표현하셨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며느리 입장에서는 그것이 늘 부담스러웠다.

성인이 된 이후로 부모님께 물질적인 지원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자립을 다짐했고,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충당하며 필요를 채웠다. 그렇게 십 년 넘게 살아왔던 내가, 결혼과 동시에 새로운 부모님에게서 쏟아지는 선물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누군가는 '복 터진 소리 하고 있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음을 어려서부터 알았기에, 내가 번 돈이 아닌 것은 내 것이 될 수 없다고 믿었다.

어쩌면 그 완강함은 이런 말에 가까웠을 것이다.


“저에게 뭘 주려 하지 마세요. 제 삶을 통제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한 나와 시아버지의 사이는 팽팽한 줄 위 같았다. 부딪히는 일도 잦았다.

어느 날 시아버지는 결혼 6년 만에 간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때때로 그분이 생각난다. 당시 나를 이해하지 못했을 아버지, 그리고 그분을 불편하게 여겼던 나.

그 때로 돌아간다면 조금 더 유연하게 유드리 있게 굴 것을 당시엔 왜 그리 딱딱하고 융통성이 없었을까.


이제는 그 패딩과 작별할 때가 왔다.

“너의 역할은 충분했어. 그동안 고마웠어 안녕.”

그렇게 마음속에서 오래 매달려 있던 끈을 놓았다.


정리한 옷들은 현금 2만 원으로 돌아왔다. 계좌에 입금되는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청량감이 흘렀다.

‘이 좋은 일을 왜 이제야 했을까.’ 나는 다짐했다. 이제 옷을 거의 사지도 않지만, 적어도 2년에 한 번은 크게 정리하자고. 키로 수가 적으면 업체에서 무상 수거만 해가니, 모아서 한 번에 보내는 것이 좋다.


그리고 오늘도 옷장 앞에 서며 다짐한다.

옷들도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입자고.

언젠가 인사할 날이 오기 전에, 함께할 시간을 조금 더 누려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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