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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당신이 책임 질거야?

그러니깐 당신이 책임 질 거나고?

by 조훈희

"이거 잘못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난 결재 못해. 아니 안 해"


"상무님 이거 그렇게 심각한 결재는 아닌데..."

"이거 때문에 나 짤리면 당신이 책임질 거냐고? 난 모르겠으니까 당신이 알아서 해"


펄럭이며 허공을 날아다니는 평화의 상징인 하얀 비둘기 한 마리처럼 하얀 종이에 쓰인 기안문이 펄럭이며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가장으로 살면서 나와 내 가족의 삶을 책임지는 것도 버거운데 상무님과 그 가족의 삶까지 책임지라는 말씀은 상상만 해도 너무 괴로웠다. 펄럭이는 기안문이 바닥에 살포시 내려앉을 때까지의 시간은 마치 슬로비디오를 촬영하는 것처럼 느리게 흘러갔고, 내 귀에서는 한숨소리가 계속 맴돌았다.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으면서 그 안의 삶만 아는 사람일수록 두려운 것들이 많다. 직위가 높고 잃을 것들이 많아질수록 결정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 한다. 물론 당신 알아서 하라고 상사가 집어던진 일의 결과가 좋은 경우 그 상사는 갑자기 본인이 일을 다 한 책임자로 돌변하게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회사에서는 이렇게 드라마틱한 결과는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상사는 이러한 회사의 경험적 섭리를 더 잘 알고 있다. 이럴 때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단계는 상사에게 해당 업무에 대한 실패의 리스크와 성공의 대가를 하나하나 나열해서 선택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마치 연애를 하면서 "뭐 먹을까?"라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돈가스, 김치찌개, 파스타 중 뭐 먹을까?"라고 질문해서 메뉴 선택을 쉽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객관식 문제가 주관식보다 답을 내기 쉽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선택을 한다. 그러나 식사에 대한 의지 즉, 업무에 대한 의지가 아예 없다면 실패.


그럼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간다. 두 번째는 상사를 적당히 안심시키는 방법이다.

"상무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책임집니다. 제가 기안자인데 왜 상무님이 다 책임지려 하세요? 우리 상무님은 너무 책임감이 크십니다. 역시 제가 존경할 만한 분이십니다."

라는 미사여구와 함께 만약 이 일은 잘못될 확률이 낮으며, 만약 잘못되더라도 내가 잘릴 것 임을 간지럽게 어필한다.


그렇게 말해도 되는 이유는 회사는 어지간한 사고 아니면 쉽게 사람 못 자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일개 담당자 한 명이 그 업무로 회사에 큰 사고를 칠 수 있는 능력과 권한도 없다. 부하가 책임지고라도 일을 하고 싶어 한다면 어지간한 상사는 승인을 해준다. 만약 그래도 승인해주지 않는다면 '상무님은 나를 소중히 여기시는구나'라고 좋게 생각하면 된다.


최후의 수단은 상무님께 결재 승인을 던지고 버티는 것이다. 조금 치사해 보이지만 이메일로 근거를 남기고, 언제까지 이견이 없으시면 진행하겠다고 써놓는다. 그렇게 미끼를 던져놓으면 나중에 당신은 업무 태만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있다. 또한 그 책임이 상무님께 자연스럽게 토스되기 때문에 상무님은 싫어도 억지로 보게 된다.


위의 방법으로 했는데 만약 상무님이 그 미끼를 물지 않는다면 그때는 당신이 잘못된 것임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세 번째 단계를 거쳐도 안 된다고, 상무님 험담만 하고 있다면 10년 뒤에 당신은 지금 당신의 상무님처럼 될 확률이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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