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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훈희 Jul 23. 2021

부모님 가슴에 락카를 뿌린 이유

락카 - 어른이 되면 보이는 것들 중

공구상에서 은색 락카를 샀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곳에 빨간색 자전거를 끌고 가서는

딸랑딸랑 소리가 나도록 락카를 신나게 흔든 뒤 뿌리기 시작했다.

오래된 빨간색 자전거에 은색 락카를 뿌리면

번쩍번쩍 빛이 나는 최신형 자전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민학교 2학년 짜리가 혼자

락카칠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락카의 손이 닿은 곳은

자전거의 빨간 색 밑바탕이

번쩍이는 멋진 은색이 되기는 커녕


영화 터미네이터2에 나오는 총맞은 액체인간 처럼

은색 구멍이 숭숭 난 것 처럼 되었고,

더욱이 나를 향해 불었던 바람은 오히려

날 은색으로 고루고루 예쁘게 색칠하고 있었다.

이제 락카에서 더 이상 은색물이 나오지 않을 때 쯤

자전거의 상태도 락카를 뿌려댄 나의 상태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했음을 직감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간다면 오늘은 또 무슨 사고를 쳤냐며

엄마한테 구두주걱이나 잠자리채로 혼쭐이 날 각이었다.

역시나 엄마는 집에 오자마자 왜 락카를 뿌렸냐고 물어보셨고

난 그냥 나도 새 자전거를 갖고 싶어서 그랬노라고 대답했다.

그날 밤 엄마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조용히 날 쳐다 보시고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형은 얼마전에 검은 색의 새 자전거를 받았고

난 형이 타던 그 빨간 자전거를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형에게 물려받은 것은 자전거 뿐만이 아니었다.

​형이 입던 옷, 신발, 동아전과, 문제집 등등

많은 물건들이 형의 손을 거쳐야 내 것이 되었고

난 그 물건들을 받자마자 형의 이름을 지우고

황급히 내 이름으로 바꿔쓰기에 바빴다.

그러나 형과 나는 몇획을 그으면 쉽게 바뀌는 이름이 아니었기에

이름을 바꾸어 놓으면 누가봐도 물려받은 티가 심하게 났다.

내가 커서 나중에 아들을 둘 낳아서 이름을 짓는다면

꼭 첫째 아들의 이름에서 획 한 두개만 추가하면

둘째 아들의 이름이 되도록 짓겠노라 라고 다짐했다.

.

아내가 둘째를 임신해서 초음파 검사를 하러 간 날

어둑어둑한 초음파 실에서 의사 선생님은  

검고 흰 초음파 사진을 보시며 요리죠리 동글동글한 기계를 만지시더니​

둘째는 엄마 아빠 돈 많이 안 들게 하려고

형아 옷 물려입게 생겼다며 아주 효자라고 조용히 말씀을 하셨다.

​하늘은 어린시절의 내 다짐을 잊지 않았는지그렇게 거짓말처럼 두 명의 아들이 나와서 내 옆에 앉아 있다.


역시나 둘째 아들은 어린시절의 내가 그랬던 것 처럼

형의 옷을 입고, 형의 신발을 신으며, 형의 자전거를 타고, 형의 책을 본다. ​

다행히 요즘은 이름이 새겨진 스티커를 팔아서

두 아들의 이름을 획 한 두개 차이로 작명하지 않아도

​첫째 아들의 이름 스티커 위에

둘째 아들의 이름 스티커를 덧붙이면 티가 안난다.  

그래도 둘째는 샘이 많아서인지

첫째가 하는 것은 다 하고 싶어하고,

첫째에게 뭘 사주면 자기 것은 없냐고 물어본다.


그럴 때마다 둘째에게 넌 아직 어려서 안 된다고 설명하지만

그 설명이 둘째에게 퍽이나 속상한지 울먹이다가 곧 울어버린다.

부모의 마음 같아서는 두 아들에게 모두 새것을 사주고 싶다가도

물건이 다 헤지기 전에 커버린 첫째의 물건을 버리기는 아깝고, ​

둘째도 금새 커서 얼마 못 쓸 물건들에 또 돈을 들여 새것을 사기도 아깝다.

​​

속상해서 울고 있는 둘째를 안아주고 달래면서​

돈이 퐁퐁 샘 솟는 화수분이 집에 한개 쯤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계속 징징거리는 통에 나도 그만 지쳐버린다.

지금 우리 집의 둘째 아들은

엄마 아빠의 둘째 아들인 내가 그랬던 것 처럼

조만간 락카를 사들고 올 것 같다.

그리고 오래된 빨간 자전거에 새로운 색을 칠하려고 락카를 뿌리듯이

부모의 마음 속에도 지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새겨놓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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