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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san민산 Nov 02. 2022

입덧과 시덫 사이

- 백김치

딸에게는 엄마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어린 딸내미가 소녀가 되고 아가씨가 되고 사회인이 되고 배우자를 만나 엄마가 될 때 변곡점마다 엄마의 손길이 필요했고 '장하다, 장하다' 조건 없이 내리쬐는 위로와 응원이 필요했다. 사실 위로와 응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남' 편의 시댁을 나와 언제든 갈 수 있는 '내' 편의 친정이 있으면 참 좋겠다 싶었다.


첫 아이를 임신하고 나는 입덧 대신 먹덧을 앓았다.  먹어도 먹어도 속이 허허롭고 갑자기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오르면 온몸에서 묵은 결핍이 터져 나왔다. 어렵기만 한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던 만삭의 새댁은 먹덧도 흉이 될까 봐 퇴근길에 근처 시식코너에 혼자 앉아 배고픔을 어느 정도 채우고 귀가하곤 했었다.


뭘 그리 조심하며 살았을까.


어느 날 밤 갈증에 일어나서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커다란 꿀병에 백김치가 가득 담겨있었다. 자투리 배추로 썰어 담아놓으신 것 같았다. 특별한 속 양념도 없이 물 반 배추 반 하얀 백김치였다. 나는 냉장고 문을 연 채로 병을 열고 그 자리에서 백김치 반 병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출근하는 내 등 뒤에서 어머님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니, 누가 백김치를 다 먹어치운 거야!"


'헤헤헤' 웃으며 시어머니에게 엉겼으면 좋으련만  '아,...'  나는 머릿속에서 문장을 만들고 있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출근하면서 완성하지 못한 문장만 곱씹었다.  엄마가 살아계셨으면 참 좋겠다 싶은 날이었다. 


왜 그리 주눅 들어 살았을까.


이제 잘 익은 배를 곱게 썰고 홍고추도 잘게 채 썰어 가평 잣도 몇 알 띄우고 정성껏 백김치를 담는다.

정의의 파이터가 된 지금의 내가 20대의 주눅 든 나에게 위로와 응원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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