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직장인 모 기자 Jun 14. 2021

경제부 박 부장의 엑시트 플랜(exit plan)

갑(甲)이 흔쾌히 을(乙)이 되는 경우는 딱 하나다. 언젠가 갑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이 거의 확실할 때다. 평소 박부장이 언젠가 광고국으로 발령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별로 개의치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을 같지 않은 을이 갑 같지 않은 갑에게 줄 수 있는 묘한 긴장감, 그리고 '언젠가 되갚아 줄 수 있다'는 승리에 대한 확신을 박부장은 오히려 일면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편집국장이 광고국 얘기를 꺼냈을 때 박부장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며칠 전 박부장이 일부 홍보대행사로부터 명품과 골프 여행 접대를 받았다는 투서가 경영기획실로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박부장도 처음엔 오리발을 내밀었다. 하지만 투서에는 박부장에게 전달된 넥타이와 맞춤 양복, 명함 지갑에 대한 구매 영수증과 함께 항공권과 골프장, 호텔 부킹 내역까지 죄다 첨부돼 있었다. 박부장은 억울했다.


"관행이잖아요, 관행. 내가 달라고 한 적도 없어요. 그리고 산업부장도 받았고, 저 데스크 할 때 누구야, 김부장, 그래 김부장도, 저보다 더 받았으면 더 받았지. 왜 저한테만 이러세요"

"알아, 아는데. 투서가 들어왔잖아. 그리고 그때하고 지금이 같아? 이거 SNS에라도 나돌면 어떻게 할 거야?"

"국장, 아니 선배. 진짜 이럴 거예요?"

"요즘은 기자들이 익명으로 글도 여기저기 싸지르는데, 누군가 책임은 져야지. 이해해 주라. 알겠지? 일단 광고국에서 좀 기다려봐"

"그럼 지금 광고국장은 어떻게 할 건데요?"

"니가 국장하긴 그렇고, 신설팀 만들어 준다니까, 팀장하면서 있어봐"

"팀장? 이 나이에 팀장하라고요? 이건 아니죠. 선배. 여기, 이거 골프 부킹. 이거 기억나죠? 내가 선배 데려간 거?"


박부장은 이 얘기를 내뱉자마자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국장의 표정은 싸늘하게 변한 이후였다.


"박부장, 이쯤 하지. 난 사장님 보고하러 갈 테니까 나가봐. 그리고 이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억울하면 너도 찌라시 뿌리던가. 너 그런 거 잘하잖아."


박부장은 자리에 돌아와서도 진정이 되질 않았다. 광고국 팀장이라니. 이미 업계에 소문은 돌았겠지만, 이대로 물러났다가는 어떤 꼴을 당할지 불 보듯 뻔했다. 


고민하던 박부장은 재작년에 퇴사해 인터넷 언론사를 차린 선배를 떠올렸다. 마침 선배도 회사 근처였다. 박부장은 다급한 마음에 선배가 있다는 카페로 곧장 향했다. 그리고 선배에게 '인터넷 언론사 창업'에 대해 상담했다. 물론 투서 얘기 따위는 하지 않았다.


"기사는 누가 써요?"

"똘똘한 애들 두어 명 고용하고, 인턴기자 이런 애들 써. 어차피 기사는 연합이 써주는데, 대강 베껴. 그건 선수잖아"

"근데, 돈이 돼요? 누가 광고를 하긴 해요?"

"광고 생각하지 마. 2~3년 키워서 포털 제휴만 통과하잖아? 그러면 회사 가치가 몇 배는 뛴다니까? 그거 어디에 팔고 또 하면 되지"


선배와 '상담'을 마친 박부장은 본격적으로 고민을 시작했다. 버티느냐, 나가느냐. 버티면 다시 편집국 복귀가 가능한가. 복귀한다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밤낮없이 살았던 20여 년을 생각하니 답은 하나로 귀결되는 듯했다. 이미 '기스'가 난 상황에서 국장 승진은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다. 


'하긴 요즘 발에 치이는 게 언론사인데. 요새 누가 신문 보고 TV 보나'


이런 생각을 하니 당장 생활비와 사업 밑천은 어떻게 마련하느냐가 다시 고민됐다. 누구처럼 '금수저'도 아닌 데다가 식솔까지 딸린 박부장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한참 골똘히 생각하던 박부장에게 데스크가 말했다.


"부장, 기사 올렸습니다"


박부장은 아픈 머리를 흔들며 올라온 기사를 열었다. 정부의 창업 생태계 조성과 관련된 기사였다. 그 순간 박부장은 세 글자를 떠올렸다.


'눈 먼 돈'

박부장은 기사를 보지도 않고 출고시키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상상 속에서 박부장은 벌써 국회의원과 장관과 맞담배를 태우는 언론사 대표가 돼 있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특정 인물이나 기관과 무관합니다.


#엑시트 #창업 #나도대표

이전 22화 경제부 박 부장의 현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