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약속 시간 7시가 다가왔지만 박부장은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박부장은 특별히 할 일이 없었으면서도, 핸드폰 게임을 하다가 7시 15분에 맞춰서 사무실에서 나왔다. 사무실 앞에서 담배 한 대 피우고, 근처 고급 일식집까지 슬슬 걸어가면 10~15분, 약속 시간보다 30분가량 늦는다는 사실 따위는 박부장의 걸음을 빨라지게 만들 수 없었다.
이날 약속은 일종의 '애프터 접대'였다. 박부장이 직접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쓰며 '유망 스타트업'으로 소개한 신생 기업 A테크의 공동창업자 3명이 감사를 표하겠다며 만든 자리였다. 박부장은 손을 휘적휘적 저으며 발길을 옮겼다. 한때 대기업 간부와 연구원으로, 유명 학자 아들로 잘 나갔던 사람들이 일식집에 앉아 배고픔을 참아가며 자신을 기다리는다는 생각에 절로 휘파람까지 나왔다. 이윽고 식당에 도착한 박부장은 매우 급하게 온 척 예약된 방으로 들어갔다.
"어이구, 늦었습니다. 갑자기 마감할 게 생겨서"
기자라는 직업의 좋은 점은 '마감'이라는 핑계를 댈 수 있다는 점이다. 약속에 늦을 때마다, 가기 싫은 자리를 펑크 내거나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탈 때마다 박부장이 늘 '마감'이란 단어를 입에 올렸다. 박부장의 의도된 수선스러움에 스타트업 공동창업자 셋은 과장된 웃음과 몸짓으로 박부장을 맞았다. 한 달 전 박부장과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와 달리 정장을 입고 멀끔한 모습이었다.
"오늘은 후드티 안 입고 계시네요?"
"에이, 후드티는 사진 찍을 때나 입으면 되죠"
"얼라들 입고 기분 내게 해 주면 되죠, 저희끼리 그럴 거 있겠습니까"
"부장님, 와인 좋아하시죠? 저희가 사시미도 좋은 걸로 시켜놨습니다"
와인 2병이 커다란 접시 한 가득 나온 숙성 회에 각종 해산물에 버틸 리 만무했다. 그럴 때에 대비해 마련한 위스키 '발렌타인 21년산'과 박부장은 모르는 고급 몰트 위스키까지 테이블에 올라왔다. 거기에 CEO는 박부장에게 봉투까지 하나 내밀었다. 박부장은 봉투를 슬쩍 열어봤다. 백화점 상품권 100만원 어치가 들어있었다. 아무리 박부장이라지만, 기분이 좋은 와중에 안쓰러움과 불편함까지 느꼈다. 우선 대기업 간부와 연구원으로 잘 나갔던 양반들이 이렇게 저자세를 유지하는 게 안쓰러웠고, 또 무슨 부탁을 할지 몰라서 불편했다.
"아니, 뭘 이렇게까지 준비하셨어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기사를 정말 잘 써주셔서, 큰 도움 받았습니다"
"사실 그때 투자 미팅 계속 진행 중이었거든요. 그런데 기사가 마침 타이밍 좋게 나왔죠"
"아, 투자 받으셨어요? 잘 됐네요. 얼마나요?"
"예, 저희 한 70억 정도"
"70억이요?"
박부장은 목구멍으로 술이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박부장이 보기에 이 회사는 실체가 모호했다. 기술력이나 사업 아이템이 그렇게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박부장이 추후 광고와 협찬을 요구하기 위해 창업진 경력과 회사 기술력을 상당히 부풀려 기사를 쓴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도 허위기사 수준으로.
'70억 벌고, 100만원, 그것도 상품권이라니'
부아가 치민 박부장의 눈에 테이블 구석 차키 하나가 눈에 띄었다. 가운데에 크게 찍힌 은빛 고급 외제차 브랜드가 상당히 반짝였다.
"차, 바꾸셨어요?"
CEO가 멋쩍은 듯 차키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제 차인가요, 리스죠, 리스. 법인 리스"
박부장은 한 소리 하고 싶었다. 투자받자마자 차부터 바꾸는 창업자를 꼭 탓하려는 건 아니었다. 배가 아팠다. 하지만 박부장은 꾹 화를 눌렀다.
"와, 진짜 제가 기사 썼지만, 이렇게 잘 됐다니 뿌듯하네요. 우리나라 IT산업에 한몫한 것 같은데요?"
"다, 박 부장님 덕분입니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지난번에 말씀드린 광고하고, 협찬도 바로 진행할 수 있겠네요"
박부장의 얘기에 CEO는 대답 없이 홍보·마케팅을 맡은 임원을 바라봤다. 박부장은 한 마디 더 보태려는데 임원이 다급하게 술잔을 채웠다.
"그럼요, 저희 실무 담당자가 검토하고 있으니까요. 일단 한 잔 하시고."
"검토요?"
"스타트업이 그렇잖습니까. 핏(fit)도 맞춰보고, 투자자 눈치도 봐야 하고"
"부장님, 술을 한 병 더 시키...지 말고요, 강남으로 넘어가셔서 한 잔 더 하시는 거 어떠실까요?"
박부장은 갑자기 눈을 피하고 말을 돌리는 모습에 당장 상을 뒤집어엎고 싶지만 참았다. 훗날에 대한 기대, '강남'이란 단어가 준 반가움, 그리고 신생 스타트업에 대한 일종의 배려까지 조금 섞여 있었다. 그렇게 네 사람은 자리를 정리하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박부장은 회사 근처 택시 잘 잡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박부장은 모범택시를 타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쪽 가서 택시 타시죠"
"아, 죄송해서 어쩌죠. 저는 갑자기 다른 미팅이 생겨서요"
CEO가 정말 긴급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황송한 듯 허리를 숙였다. 박부장은 신생 회사라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대리라고 부르시죠. 제가 여기가 어딘지..."
"아,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이만"
'정말 급하다면서 대리가 와서 기다린다고?' 박부장은 속이 또 꼬였다. 조금씩 자존심이 상해 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공동창업자 하나가 다가왔다.
"저희 대표가 술을 잘 못하잖아요. 제 차 타고 가시죠. 대리 불러놨습니다."
그는 이윽고 달려온 대리에게 키를 주고 앞에 세워둔 차로 박부장을 데려갔다. 박부장이 연봉 3년을 꼬박 모아야 살 수 있는 고급 세단이었다. 매일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며 주말에 10년 된 국산 SUV를 끄는 자신과 비교됐다.
"이거도 새로 하신 거예요?"
"아, 아닙니다. 이건 예전부터. 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기사님, 제가 주소 불러드릴게요. 강남역 지나서 쭉 올라가시면 되고요"
그는 기사에게 주소를 설명하고선, 박부장을 안심시키려는 듯 덧붙였다.
"저희 집 근처라, 제가 잘 알거든요. 가시죠"
'심지어 집이 강남이야?' 박부장은 후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A테크 털고 내일 오후 보고로 올려'
박부장은 얼른 핸드폰을 집어넣고 강남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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