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부장은 광고국 송차장이 넌지시 내민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종이에는 제목도 없이 기업 다섯 곳의 이름만 달랑 적혀 있었다.
"부장님, 여기 취재해서 기사 좀 해주시면, 그다음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게 뭔데"
"최근 6개월 동안 저희한테 광고나 협찬 하나도 안 한 곳들입니다"
"어허, 송차장.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잘 타일러야지"
"꿈쩍도 안 하더라고요. 그리고 저희 국장님께서 인센티브도 경제부 쪽으로 다 주는 걸로 결정하셨습니다"
"움, 그래요? 국장께서 도와달라고 하시면 어쩔 수 없지."
송차장이 물러가고, 박부장은 가만히 종이를 들여다봤다. A전자와 B화장품 회사, C 정유회사, D 가전회사, E 유통회사가 적혀 있었다. 박부장은 고민했다. 광고국 요청이라고 덥석 물면 탈이 나게 돼 있다. 광고국장은 호시탐탐 편집국 복귀를 노리는 능구렁이라는 사실을 박부장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소위 '조질 곳'과 '관리할 곳' 정도는 구분해야 노후 대비도 할 수 있다.
박부장은 A전자부터 생각했다. 이미 회사 선배 여럿이 임원으로 가 있는 곳이었다. 회사 경영진하고 관계도 좋았다. 함부로 찔렀다간 역공에 당할 수 있었다. 박부장은 펜을 들어 A전자를 지웠다. 그 다음은 화장품을 만드는 B사는 회사의 주주 중 하나였다. 자고로 주주는 건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다음, C 정유회사. 박부장은 딱히 회사나 경영진과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노련한 박부장은 서두르지 않았다. 최근 기사를 검색했다. 중동기업에서 투자한 두둑한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사세를 확장시켜 나가는 중이었다. 박부장은 두어 차례 만난 적 있던 C사의 임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사장님, 접니다. 박부장입니다. 네, 안녕하셨죠. 다른 게 아니고 C사 혹시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니, 우리 기자들이 자꾸 무슨 보고를 하는데, 내가 부사장님 생각이 나서. 네, 그러면 제가 좀 더 확인시키겠습니다. 네, 조만간 한 번 뵙죠. 날짜 주세요"
박부장은 전화를 끊고선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적금을 하나 든 기분이었다. A, B, C를 지우고 이제 남은 건 외국계 D가전회사와 E유통회사뿐이었다. 박부장은 각 회사의 담당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애매하게 돌려 말하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카리스마 있게 취재 지시를 내렸다.
"여기가 광고를 안 한다네. 오너나 대표 쪽으로 뭐 있나, 조질 것 좀 찾아봐. 빨리"
박부장은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담당 기자들도 경험이 많고 말귀를 잘 알아듣는 후배들이기에 별 걱정이 되지 않았다. 특히 외국계 D가전은 박부장도 벼르고 있던 차였다. 미국에서 최근 새로 부임한 대표가 한국의 언론 문화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임 석 달이 다 돼가지만, 필드는커녕 회사에 인사라도 한 번 오거나 제대로 된 식사 자리도 한 번 안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박부장뿐 아니라, 대부분 언론사 부장들이 술자리에서 공통적으로 내놓은 의견들이었다. 그래서 박부장은 D사 담당 기자에게는 더 세게 얘기하기도 했다. 한국 기자의 매운맛을 보여주라고.
박부장은 이런 생각을 하며 의자를 재끼고 눕듯이 앉아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잠깐 눈을 붙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박부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박부장은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웬 중후한 노인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박부장이십니까, 저는 한민당의 김복동 의원입니다."
김복동 의원은 당대표까지 지낸 6선 의원이었다. 원로 격에 들긴 하지만 아직 입김이 만만치 않았다. 박부장은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 세우고 전화를 받았다.
"네, 의원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김복동 의원의 얘기는 정리하자면 이랬다. D사의 신임 대표가 과거 본인이 외국에 있을 때부터 호형호제하는 사이인데, 그쪽 기자가 부장 지시라며 대표 주변을 캐고 다닌다고 하니, 취재를 막을 생각은 없고 무슨 일인지만 살짝 귀띔을 해달라는 정도였다. 느리지만 정확한 발음으로, 젠틀하지만 무거운 목소리였다.
"저희 기자가요? 어허, 그놈이 또 무슨 작당을 꾸미려고. 의원님, 죄송하지만 제가 아직 보고 받은 건 없지만, 제가 지금 바로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박부장은 의원의 만류에도 잠시 전화를 내려놓고 D사 담당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부장이야. 귀하는 무슨 취재를 뭘 어떻게 하는 거야. 보고도 없이. 외국계 회사 취재하면서 설마 점령군처럼 행동한 거야? 우리 회사가 그렇게 취재하던가! 취재원들께 정중히 사과드리고, 무슨 취재를 어떻게 했는지 지금 당장 보고해"
박부장은 의원에게 들리게 일부러 더 똑똑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기자를 꾸짖고선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의원님, 제가 기자에게 지시해 놨습니다. 제가 확인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늘 말씀 새겨듣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부장은 전화를 끊고선, 리스트에서 D사도 지워버렸다. 이제 남은 건 E유통회사였다. 여기서 뭐라도 뽑아내야 했다. 박부장은 담당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찾았어? 새끼야, 뭐 하는 거야. 얼른 찾아. 지금 시간이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그래! 빨리 찾아서 보고해!"
박부장은 순간적으로 신경질이 났다. 화를 식히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E유통회사 홍보 임원이었다. 박부장이 현장기자 시절부터 홍보팀 직원으로 만나 20년째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박부장은 핸드폰을 잠깐 응시하고선 무음으로 소리를 바꿨다. 이윽고 전화가 끊기더니 또 울렸다. 다시 E사 임원이었다. 박부장은 이번엔 액정이 보이지 않게 핸드폰을 뒤집어엎어놨다.
'언론인이 어쩔 수 있나. 공과 사는 구별해야지'
박부장은 이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의자를 뒤로 재끼고 책상에 발을 올린 채.
※ 이 글은 픽션입니다. 특정 언론사나 기업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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