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보나로마] 9. 로마 식도락의 'ㅅ'
* Sawu bona(사우보나) : 아프리카 줄루족의 인사말. '나는 당신을 봅니다'라는 뜻. *
당신의 여행에서 먹거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되는가?
유럽에서의 한달살기 계획을 세울 때 매 끼니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것인가는 꽤 중요한 이슈였다. 여행지의 삶이 일상처럼 느껴지기를 꿈꾸며 떠난 여행이었기 때문에 그곳의 식재료를 사서 다양한 요리를 해 먹는 것 역시 중요한 계획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여행자의 "로망"일 뿐이었다. 나는 생존형 요리사일 뿐이라 식재료에 대한 흥미나 이해도 부족한 편이기 때문이다. 현지에서만 구할 수 있는 식재료가 궁금하긴 했지만 양파와 샬롯의 맛 차이 같은 건 잘 구별하지 못했고, 편식쟁이라 낯선 맛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여행 첫 주 여러 시도들을 했지만, 결국 아주 심플한 먹계획으로 정착되었다. 아침은 구운 빵과 샐러드, 과일 그리고 모카포트로 만든 커피 한 잔, 점심이나 저녁 중 한 끼는 맛집을 방문해서 야무지게 먹기, 나머지 한 끼는 챙겨간 재료로 한식을 만들어 먹거나 주변 식당에서 테이크아웃해서 먹기(물론 귀가 시간에 따라 외식을 두 끼 이상 했던 날들도 종종 있었다.)
아래는 로마의 음식들을 느긋하게 하나씩 정복해 간 기록이다. 식도락의 'ㅅ'에도 못 미치는 리스트이지만 음식에 큰 에너지를 쓰지 않고 적당히 잘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던지는 추천이다.
1. 트러플 파스타
이탈리아 하면 트러플 아니겠는가. 한국에서도 트러플 오일이나 트러플 살사소스로 요리한 메뉴들을 먹었지만, 이 버섯은 대체 왜 이렇게 비싼가 의구심만 들곤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한국보다 훨씬 합리적인 가격으로 트러플을 바로 먹어볼 수 있었다. 오일이나 소스가 아니라 버섯 그대로 말이다. 은은하게 올라오는 향이 아니라 코끝을 치고 가는 선명한 향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트러플을 이용한 메뉴 중 가장 접근성이 좋은 것은 트러플 파스타와 트러플 스테이크이다. 이왕이면 얇게 저민 트러플을 올려주는 식당을 꼭 방문해 보시길-
- 판테온 근처 “Pietro al Pantheon”
"Pietro al Pantheon"은 두 번이나 방문한 곳이고 세 번 가지 못했음이 아쉬운 곳이라 추천하고 싶다. 홈메이드 파스타를 파는 레스토랑답게 소박하고 따뜻한 공간에 다정한 직원이 있는 곳이다. 사진에서 보는 대로 묵직한 트러플 크림소스에 슬라이스 된 트러플이 올라가 있다.
https://share.google/EABLIbTBefBOsScML
- 아씨시 근교 여행에 들렀다 맛본 트러플 파스타의 비주얼도 함께 올려 본다.
https://share.google/uzKkaHhhrcoocR6Ru
2. 소꼬리찜
아주 많은 사람이 추천했을 그 메뉴. 그간 쌓아온 느끼함을 내려줘서 한국인이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그 메뉴. 소꼬리찜이다. 토마토 베이스의 소스와 아주 부드러워 녹아내릴 것만 같은 살코기는 크게 호불호를 타지 않을 맛이다. 우리의 갈비찜과 비교하며 한국 음식에 대한 향수를 달래준다고 평한 사람들이 많던데 그건 동의하기 어렵다. 고기의 부드러움이야 비견할 만 하지만, 이건 그냥 전형적인 이탈리아의 스튜맛이다. 조금 더 매웠으면 좋았을 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으슬으슬한 몸을 따끈하게 데우고 싶다면 이것만 한 게 없다.
- 스페인계단 근처 ”La Buca di Ripetta”
식당 ”La Buca di Ripetta”에 간 날은 기분이 조금 울적했던 터라 천천히 이북을 읽으면서 애피타이저부터 메인,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즐겼다. 손님이 많고 테이블 간격도 좁아 조금 정신이 없어 여유를 만끽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식전 빵을 찍어 먹는 올리브유도 함께 주문한 와인도 너무 맛있었다. 가라앉았던 마음이 조금은 위로 떠올랐던 시간이었다.
https://maps.app.goo.gl/MMTZgHQ1uAQbcLHh6
3. 피자
이탈리아에서 피자는 정말 대중적인 음식이라 가장 많이 먹고 돌아온 메뉴이다. 피렌체 역사 안 레스토랑에서, 트라스떼베레 현지인 추천 맛집 피제리아에서, 집 근처 테이크아웃 전문 조각피자집에서... 모두 두루두루 맛있었지만, 본토의 피자라면 뭔가 더 특별한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 때쯤 나폴리 근교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로만 듣던 나폴리 피자를 영접했다. 이게 진짜다. 얇고 쫄깃한 도우, 깔끔하면서도 진한 소스, 부드럽고 쫀득한 치즈... 가장 피자다운 맛이어서 가장 인상적이다. 전 세계 동네방네 유명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 트라스떼베레 쪽 ”Pizzeria Boccaccia”
지아니콜로 언덕에 올라갔다가 내려와 들렀던 조각피자집. 구글 후기가 마음에 들어 방문한 곳인데, 입구에서 한참을 헤매다 들어가서 그런지 더 반가웠다. 고르는 데 한참 걸릴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피자가 너무 많았다. 영어에 능숙한 직원이 아니라 우리 둘 모두 다양한 방법의 소통을 시도했고, 덕분에 나의 기호에 꼭 맞는 피자를 골라 먹을 수 있었다. 조각의 사이즈도 고객이 직접 고르는데, 내가 원하는 사이즈를 손짓으로 알려주니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라. 그래 여긴 인당 피자 한 판을 가볍게 먹어치우는 곳이라고. 땀 흘리고 난 뒤 맥주 한 병과 함께 하는 피자라니... 세상 행복했다.
https://share.google/EjanF6BNqe4SCMv5G
- Furio Camillo 역 근처 ”Prima la Materia”
아주 작고 소박한 테이크아웃 조각피자 전문점이다. 내가 묵었던 동네에 위치한 곳이라 관광지에서는 다소 떨어져 있다. 줄리아가 나에게 넘겨줬던 동네 맛집 리스트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곳이다.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참신한 아이디어를 보태 다양하게 변주한 맛들이 있어 좋았고, 고르는 족족 다 맛있어서 더 좋았다. 영어에 서툰 주인분은 낯선 동양인인 나를 보고 잠시 당황해했지만 수줍음 가득한 얼굴로 하지만 프라이드가 느껴지는 어조로 최선을 다해 각각의 맛을 소개해 주셨다. 사진 속 레몬 올라간 피자가 나는 특히 마음에 들었다. 종종 뭐 먹을까 고민하기도 싫을 때 슬쩍 들러 피자 몇 조각 사 왔던 나의 소중한 단골집- 근처에 볼일이 있을 때라면(일부러 피자를 먹으러 거기까지 가는 건 노노) 한 번쯤 들러보시라 권하고 싶은 곳.
https://share.google/ksuvTIYzxj5sN74W4
+ 나폴리 일일투어 기록도 남겨둘 거라 그때 다시 올리겠지만, 그래도 참지 못하고 미리 투척하는 나폴리 피자 맛집!!
https://share.google/LcX6wujPN77dZwCPK
4. 까르보나라
까르보나라는 마지막까지 먹을까 말까 고민했던 메뉴이다. 너무 짜다는 악평을 여러 차례 들었기 때문이다. 평소 심심한 간에 맞춰진 입맛이라 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소금을 적게 넣어 요리해 달라는 부탁은 부질없다. 까르보나라의 짠맛은 소금이 아니라 치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치즈를 적게 넣어달라고 하기에는 망설여진다. 그건 또 까르보나라의 진짜 맛이 아닐 것 같아서 말이다. (가이드북에서는 치즈 가루를 따로 덜어달라고 요청해도 된다고 했다.)
- 콜로세움 근처 ”Iari The Vino”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를 둘러본 후 방문한 "lari The Vino"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까르보나라를 맛봤다. 짠맛을 중화시키기 위해 구운 야채도 함께 주문했다. 달걀노른자와 치즈가 어우러져 진한 풍미를 만들어낸다. 맛있다. 그런데 짜다. 야채의 도움을 받아 최선을 다해 먹었지만, 결국 조금 남기고 부랴부랴 디저트를 주문했다. 이곳도 로마의 여느 레스토랑들이 그러하듯이 티라미수 맛집이다. 덕분에 식사를 산뜻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참고로 구운 야채를 주문한 건 신의 한수!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는 생야채 샐러드를 만나기 어렵다. 난 야채 본연의 맛을 즐기고 싶은데, 대부분 올리브유에 흥건하게 젖어서 나오더라.(내가 주문을 잘 못했을지도...) 여기 구운 야채는 비교적 담백하게 조리되어 까르보나라의 짠맛을 조금 눌러 주었다.
https://share.google/A5z05FkX6x7N0AIGY
5. 라자냐
개인적으로 각별히 사랑하는 메뉴 '라자냐'. 처음 맛본 라자냐가 너무 환상적인 맛이라 메뉴판에 있다면 늘 주문을 고민하게 되는 메뉴이다. 얇고 납작한 파스타 사이에 층층이 라구 소스와 베사멜 소스가 있고, 그 위에는 고소하고 진한 풍미의 치즈가 녹아내린다. 분명 다 아는 맛인데, 겹겹이 쌓여 있는 걸 한 입 떠먹으면 맛있다는 말만 연발하게 된다. 이탈리아에서도 각기 다른 식당에서 3-4번은 주문한 메뉴인데, 어째 사진은 아래 두 곳밖에 없는지 알 수가 없다. 가본 레스토랑 모두 아주 평범하고 평균적인 맛이었다.(주로 홈메이드라고 강조했으나 미리 만들어 두고 데워 주는 거라 구별이 잘 안 되기는 했다는...) 하지만 뭐, 라자냐는 사랑이니까-
- 떼르미니 역 근처 “첸트로(centro)”
이탈리아어로는 첸트로로 읽는 모양이다. 내가 참고한 가이드북에도 언급되어 있고, 한국인들의 후기도 많은 편인 식당. 까르보나라, 스테이크 등등 여러 메뉴들의 맛이 고루 괜찮은 편인 듯한데, 인터넷 속 어느 분께서 인생 라자냐를 이곳에서 만나셨다고 해서 로마에서의 첫 끼를 여기서 해결했었다. 적당히 맛있긴 했지만, 나의 인생 라자냐는 아닌 걸로-
https://share.google/7YTxB4mTq0y9VNPjv
- 떼르미니 역 근처 “Ristorante le caveau”
엄밀하게 말하자면 "비토리오 에마뉴엘레(Vittorio Emanuele)"역 근처에 위치한 곳이지만, 대충 떼르미니 역 주변을 쏘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는 레스토랑이다. 랍스터 파스타를 먹으러 들른 곳인데, 공교롭게도 그날은 먹을 수가 없다고 해서 라자냐를 주문했다. 너무 많이 걸은 뒤라 땀도 나고 진이 빠진 상태였는데, 맥주와 함께 천천히 맛본 라자냐는 꽤 맛있었다. 챈트로보다는 여기를 더 추천하고 싶다.
https://share.google/ofnNkkkzTHVFSZVoy
+ 아티초크(Carciofi)
예전에 어느 레스토랑에서 살짝 맛본 적이 있던 아티초크. 로마에서는 튀기거나 구워서 애피타이저로 즐겨 먹는다고 해서 꼭 제대로 즐겨보고 싶었던 메뉴였는데, 이번에는 올리브유를 잔뜩 뿌려 구운 버전을 맛보게 되었다. 부드러운 안쪽 부분만 먹는 거라던데, 나는 잘 모르고 겉면도 잘게 잘라먹다가 날카롭게 씹히는 부분에 놀라기도 했다.(예전에도 이렇게 먹었던 기억이 ㅋㅋ 실수는 반복된다.) 로마를 뜨기 전에 튀긴 것도 한번 먹어봐야지 했는데, 의외로 기회가 없었다. 구운 것(솔직히 그냥 올리브유에 버무린 것 같은)은 딱히 추천하지는 않는다.
가끔 여기가 로마인지 한국인지 헷갈릴 정도로 한국인들로 가득 찬 식당에 들어서게 되면 나도 모르게 자리를 황급히 떠나게 될 때가 있었다. 약속한 듯이 똑같은 메뉴들이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어 그들 중 한 명이 되는 게 꺼려지는 마음이 들어서이다.(로마의 유명 젤라또집에서 내가 한국인임을 알아보자마자 입을 떼기도 전에 "너도 이 세 가지 맛을 먹을 거지? 근데 이 맛은 품절이야"라는 설명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애초에 내가 한국어로 정보를 검색하고 있으니 우리나라 관광객들 사이에서 유명한 식당이 검색되는 게 당연한 일이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여행인데 굳이 남들이 맛있다고 추천한 메뉴를 피하면서 잘 모르는 다른 걸 시키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그런데 또 내가 무슨 가이드 투어를 따라간 것도 아닌데 남들이 좋다는 것만 쫓아다니는 게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이 딜레마- 이럴 땐 구글맵의 후기와 평점을 확인해서 고르려 하는데, 막상 평이 좋은 곳을 골라 가면 서비스 줄 테니 후기 좋게 남기라는 이야기도 듣게 되더라.
이러나저러나 식당 선택, 메뉴 선택은 참 어려운 일이다. 대충 한 끼 먹으면 되지 싶다가도 세상 소중하고 행복한 한 끼이기를 바라는 마음 역시 누르기 어렵다. 계획했던 맛집에 가서 대표 메뉴를 맛보는 즐거움도 누리시면서 거리를 쏘다니다 마음에 드는 식당에 불쑥 들어서는 경험도 자주 해보시길 바란다. 결국 중요한 건 밸런스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