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보나로마] 8. 낯선 오페라보다는 아는 맛 클래식 공연 보기
해외 여행할 때 나는 기회가 닿는다면 현지인들 틈에 끼여 음악 공연을 즐기고자 한다. 특히 유럽은 건축물 투어가 따로 있을 정도로 멋들어진 공연장도 많고, 한국보다 비교적 저렴한 금액으로 유명 예술가들의 공연을 볼 수 있어 만족도가 높다. 이번 로마 여행에서 보려고 찜해 뒀던 공연은 당연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의 <토스카>였다. 이탈리아 하면 푸치니니까... 운 좋게 로마에 머무는 기간에 공연이 몇 차례 잡혀 있었다. 그런데 선뜻 티켓 예매를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남들 다 극찬하던 오페라를 꾸벅꾸벅 졸면서 본 경험이 있어서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번에는 이탈리아어로만 된 공연이라... 좋은 기회를 놓치는 건 아닌가 싶어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했는데, 유튜브로 찾아본 공연 실황이 나를 깔끔하게 단념하게 만들었다. 졸고만 올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음악 공연과는 연이 없나 보다 싶었는데, 가이드북을 뒤적이다가 보르게세 공원 위쪽에 아름다운 공연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파르코 델라 뮤지카 오디토리움(Auditorium Parco della Musica Ennio Morricone). 유명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2002년 세운 음악홀로 유럽에서 가장 큰 다기능 음악 복합 건물이라는 설명도 덧붙어 있다.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 2025년 1월 공연 리스트를 검색하는데,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띈다. 지휘자 정명훈.
https://www.auditorium.com/en/
먼저 1월 9일과 11, 12일에는 베토벤 교향곡 7번과 Sergey Khachatryan과 함께 하는 브람스 바이올린 콘체르토이고, 1월 16~18일에는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과 로시니 Stabat Mater이다. 앞선 공연의 곡들을 더 잘 알고 좋아하기도 했지만, 이미 좋은 자리들은 다 나간 상태이고 피렌체 여행 일정과도 부딪쳐 아쉽지만 슈베르트와 로시니의 음악을 듣게 되었다.(그때부터 내 여행의 bgm은 저 두 작품이 되었다.) 54.86유로. 한국과 비교하면 거의 절반의 금액으로 아름다운 공연장에서 음악을 즐길 수 있다니 행운이다. 여담이지만, 정명훈 지휘자는 이 공연장과 연이 깊은 모양이다. 이번 공연이 이뤄지는 산타 체칠리아 홀이 2002년에 오픈했는데, 그때도 지휘를 맡았다고 한다.
공연 당일, 챙겨간 옷들 중 그나마 격식을 차린 듯해 보이는 옷으로 골라 입고 집을 나섰다. 비가 한바탕 내렸는지 도로가 축축하게 젖어 있다. 언제든 다시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하늘이 흐려 근처를 구경할 생각은 접어 두고 일찌감치 공연장으로 향했다. 전차에서 내려 세실리아홀로 걸어가는데, 오늘 공연될 곡들의 선율이 어디선가 흘러나온다. 유리로 된 아카이드에는 갤러리, 서점, 레스토랑이 늘어서 있다. 아주 운치 있었다.
꽤 큰 규모의 서점을 둘러보다 여행을 떠나기 전 목표한 일을 하나 이룰 수 있었다. 바로 한강 작가의 책 발견하기.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뤄낸 그녀의 작품은 나 역시 오랜 시간 사랑해 왔던 책들이다. 연말부터 이 시대를 살고 있음이 화가 날 정도로 속이 뒤집어지는 소식들만 들려왔지만, 한강 작가와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임을 부정할 수 없다. 소설 분야의 베스트셀러만 모아 둔 서가에서 그녀의 책을 발견했다. 이탈리아 버전으로 하나 구입할까 잠시 망설였지만, 절대 다시 들춰보지 않을 기념품이 될 것 같아 그냥 사진으로만 남겨 두기로 했다. 귀국하면 집에 있는 책으로 다시 한번 읽어봐야지.
공연장은 예상보다 훨씬 근사했고, 스텝들은 아주 친절했다. 예매해 둔 자리도 무대에서 가깝고, 좌석들의 경사도 큰 편이라 앞이 전혀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공연을 보는 내내 조금 더 뒤쪽 자리나 아예 2층 좌석에서 무대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자리들은 음향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공연은 아주 훌륭했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을 때 늘 느끼지만, 소리가 조금씩 쌓여가다 모일 때의 감동은 정말 크다. 아직은 클래식 입문자 수준이라 지휘자에 따라 어떤 드라마틱한 차이가 생기는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호흡은 나에게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는 '성모 애가'로 번역되는 종교 음악인데, 네 명의 독창자와 합창단의 노래도 들을 수 있다. 자신의 목소리만으로 공간을 가득 채우는 독창자들도 참 대단했지만, 합창단들의 소리가 쏟아질 때면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열정적인 박수를 공연자들에게 돌려주며 앞으로도 많이 듣고 보고 느껴야지 다짐했다.
타지에서 이런 공연을 찾을 때면 우리나라와 이 나라의 관람 문화를 자연스레 비교하게 된다. 연령층은 전반적으로 높았으며 복장은 우리보다 자유로워 보였다. 관람 분위기도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프로그램북을 정독하면서 공연을 즐기는 분들이 꽤 많았다. 앞 좌석의 여자분은 악보집을 펼쳐든 채 열정적인 고갯짓으로 호응하며 선율을 따라가고 있었다. 사실 나는 우리 공연 문화가 너무 엄숙하고 타인의 행동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그들의 이런 모습이 도리어 보기 좋았다.(단, 몇 차례 아기의 칭얼대는 소리와 핸드폰 소리가 공연을 방해하기도 했는데, 이건 좀 아쉬웠다. 이것마저 그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봤는데, 벨소리가 울리자 주변 이탈리아인들이 그 특유의 어이없다는 손동작을 취하는 걸 보니 그건 아니었나 보다.)
낯선 곳에서 누린 귀한 시간이었다. 공연의 여운은 진하게 남아 돌아오는 내내 미완성 교향곡의 선율과 유사한 동요 옹달샘을 흥얼거릴 수밖에 없었다는...
마지막으로 멋진 공연장 사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