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보나로마] 6. 이탈리아인처럼 에스프레소 즐기기
* Sawu bona(사우보나) : 아프리카 줄루족의 인사말. '나는 당신을 봅니다'라는 뜻. *
이탈리아 사람들은 정말 커피를 사랑한다. 특히 에스프레소. 카페야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바들도 낮에는 커피를 판다. 어느 방송에서 알베르토가 한국은 커피가 너무 비싸다고 성토한 적이 있었는데, 이탈리아에 와보니 그 말이 너무 와닿는다. 정말 맛있는 커피를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 한국에서 커피를 마신다는 행위에는 종종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이탈리아에서는 비슷한 의미로 ‘자릿세’가 있는데, 사실 이것도 공간의 의미라기보다는 서비스에 대한 대가 정도로 생각돼서 맥락이 조금 다르긴 하다.
이탈리아 여행의 가이드북이나 블로그 후기 등을 살펴보면 커피를 주문할 때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지침이 참 많다. 그래서 처음 바(bar)에 들어갔을 때는 쭈삣거렸는데, 로마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나니 별 거 아니었는데 뭘 그리 긴장했었나 싶다. 우리나라를 방문한 여행객들의 서툰 실수들이 우습다고 느껴진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막상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서툰 모습이 영 자신 없다.
그런데 정말 간단하다. 가게에 들어가서 주변 상황을 찬찬히 살펴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가 쉽게 그려진다. 일단 계산대를 찾아라. 인기 있는 가게라면 이미 줄이 늘어서 있을 것이다. 손님도 직원도 계산대 앞에 없다 하더라도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서라. 그럼 직원이 다가올 것이다. 그다음에야 뭐, 주문하고 싶은 걸 읊으면 된다. 투어를 하면서 현지어 잘하시는 가이드분들과 카페에 함께 가곤 했는데, 그분들도 주문은 심플하게 하시더라. “one espresso, two cappuccino(복수형 같은 건 굳이 신경 쓰지 않는 듯함 - 내가 만난 사람들만 그랬을지도)”. 그럼 테이블에 앉을 거냐 바에서 먹을 거냐 가져갈 거냐 묻는데, 원하는 방식을 답하면 된다. 묻지 않는다면 그냥 바에서 먹는 걸로 간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 난 아침을 해결하려고 들어간 카페에서는 대부분 크루아상이나 파니니를 함께 먹으니 자리에 앉아서 먹었고, 그게 아니라면 에스프레소를 마셨기 때문에 바를 이용했다. 에스프레소는 양이 너무 적어서 두 세 모금이면 끝이 나므로 굳이 앉을 이유도 없다. 가격을 치르고 난 후 받은 주문서를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 서 있는 직원에게 건네주면 끝.
내가 처음 에스프레소를 마신 건 스페인에서였다. 다들 마시길래 엉겁결에 나도 따라 주문했는데, 타이어를 먹는다면 이런 맛일까 싶었다. 그 이후로는 용량 대비 비싸기만 한 이 메뉴를 주문하는 건 허세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후 한국의 커피 수준도 정말 높아져서 맛있고 멋진 곳들이 여기저기 생기기 시작했고 에스프레소라는 메뉴도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동행들 덕분에 서울이나 부산, 강릉에서 에스프레소 바에 간 적이 몇 차례 있는데, 이런 맛이 사람들을 사로잡는구나 정도의 깨달음은 얻게 되었다. 그리고 올해 이탈리아에서는 어떤 생각이나 판단이 끼어들기 전에 에스프레소가 안겨주는 복합적인 풍미에 감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진한데 텁텁하거나 쓰지 않고 부드럽고 쫀쫀하다. 그런데도 입가심이 될 정도로 깔끔한 뒷맛이라니... 좋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중학교 때 자판기 믹스 커피를 시작으로 수십 년간 커피를 즐겨왔지만,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진짜 커피의 맛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로마를 여행하시는 분들이 나와 같은 특별한 경험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곳에서 맛본 커피들을 정리해 보려 한다.
1. 산트 유스타치오 더 커피(Sant’ Eustachio Caffe)
- 부산 기장 아난티힐튼에서 마셔본 적이 있어 후순위로 미뤄뒀던 카페. 에스프레소는 맛있었는데, 여긴 주문을 받을 때 설탕을 넣어서 줄까 그냥 줄까 물어본다. 그들 기준의 정량이겠지만 나에게는 꽤 달게 느껴졌다. 난 흑설탕 1팩의 1/3 정도를 넣으면 딱 맛있던데… 아무튼 단 맛이 강하게 남아서 입가심의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당한 산미가 느껴지는 커피는 충분히 맛있어서 귀국하면서 원두를 구매하기도 했다.
2. 타짜도르(Tazza d’Oro)
- 그 유명하고도 유명한 타짜도르. 어디서든 가장 많은 추천을 받는 곳이라 상당히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한국에서 이미 독점 라이선스를 가져와서 운영하는 점포가 무려 5개나 있다고 해서 살짜쿵 기대감이 식기도 했다. 접근성이 참 좋구나. 하지만 뭐 오리지널은 다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방문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이탈리아에서 마신 커피 중 가장 독특한 풍미가 있어 여운이 남아 좋았다. 호불호가 갈릴만큼 독특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유의 맛이 느껴져서 좋았다는 뜻이다. 여기 메뉴 중 그라니타 디 카페 콘 판나(Granita di Caffe con Panna)라는 일종의 커피 슬러시가 인기라고 하니, 아이스아메리카노 사랑단들은 참고하시길.(난 한여름에도 따뜻한 커피를 즐기는 타입이라 맛보지는 않았다.)
3. 트레카페(Trecaffe)
- 보르게세 미술관에 가던 날 이른 아침 식사를 해결했던 곳이다. 이탈리아에서 마셨던 카푸치노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난 우유 함량이 적어 커피의 맛이 진하게 느껴지는 라떼를 좋아하는데, 이곳의 카푸치노가 그래서 만족도가 높았다. 참고로 이탈리아에서 라떼를 주문하면 우유를 꽤 많이 넣어 준다. 나와 비슷한 취향이시라면 차라리 카푸치노를 드시길 추천한다. 이곳의 인기 메뉴인 피스타치오 크루아상과 정말 잘 어울리니 꼭 드셔보시길. 저렇게 먹고도 뭔가 출출하게 느껴져서 파니니를 하나 주문했는데, 역대급 짠맛에 1/3도 못 먹고, 카푸치노만 한 잔 더 시켜 마시다 나왔다. 인기가 많은 가게라 그런지 정말 많은 사람들로 붐벼 마음 편히 미적대기는 좀 어려웠다.
4. 해피바(Happy Bar)
- 나만의 에스프레소 맛집. 관광지에서 다소 멀리 떨어져 있는 숙소에서 묵고 있어 어딘가를 구경하러 나갈 때만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마신다는 점이 서운했다. 숙소 근처를 열심히 구글링하여 찾아낸 곳. 점심 먹고 귀가하기 전 잠깐 들러 에스프레소를 마시기도, 카푸치노를 테이크아웃해서 집에 가져오기도 했다. 굳이 멀리서 찾아올 정도로 뛰어나고 특색 있다 말하기는 좀 애매하지만 숙소가 인근이라면 한 번쯤은 들러봤으면 좋을 법한 곳. 나는 커피만 마셨지만, 조식이나 디저트에 대한 후기들도 꽤 많았으니 참고하시길-
5. 그랩앤고
https://maps.app.goo.gl/MiTFM4LoGFPyYvJC6?g_st=com.google.maps.preview.copy
- 절대 가지 마라고 쓰는 후기. 떼르미니 역 승강장 바로 앞에 있는 곳이다. 난 Lavazza가 크게 적혀 있어 저게 이름인 줄 알았다만 아니었군. 시간이 좀 비어서 에스프레소 한 잔 하려고 들렀는데, 직원 중 한 명이 간판 사진 찍고 있는 나에게 연신 니하모를 외치며 사진 찍지 말라고 제지했다. 일단 주변 관광객들 다 사진을 찍고 있어서 난 나한테 하는 말인지 잘 몰라 멈칫하고 있었다. 그간 이게 인종차별인가 긴가민가한 일들은 가끔 있었는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황당하게 구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응수하지 못했던 게 지금도 정말 화난다. 라바짜 커피는 어디선가 한 번쯤은 마셨을 테니 굳이 기분 망치러 가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