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여든일곱 번째
"헤어지자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그 사람이 내게 이야기했다. 나는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났다. 새벽 네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꿈을 꾸지는 않은 것 같은데 난 그 목소리를 들었다. 더 이상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떼어내고 이불을 정리하였다. 머리카락은 날이 갈수록 더 많아 빠진다.
믹스커피라도 마시고 좀 일찍 회사에 가야겠다 싶어서 테이블 위에 잠시 앉았다.
그 옛날 나는 사랑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허세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건 당연히 존재하는 세상이었고 난 항상 사랑을 만났고 사귀었고 또 헤어졌다. 그리고 그런 내가 멋있어 보였다
그날 밤에는 그 사람과 난 동네의 재즈 바에 앉아 있었다. 맥주집과 재즈바 어딘가쯤인, 한동안 유행했던 그런 스타일의 어두컴컴한 바였다. 한때 내 멋에 취해 사랑했던 커티스 퓰러의 'Love, your spell is everywhere'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니 그런 기억으로 덮여 있다. 실제로 그런 음악이 나왔는지는 모른다. 내가 그렇게 만든 이미지가 머릿속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난 벡스 다크라는 흑맥주를 시켰다. 난 맥주를 먹지 않는다. 그 때나 지금이나 술은 마시지 않는다. 먼저 온 그 사람이 시킨 노가리로 보이는 마른 생선과 먹다 남은 땅콩, 생맥주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작은 코스터와 함께 예쁜 병에 담긴 흑맥주가 내 자리 앞에 놓였다. 그 사람의 테이블과 내 테이블은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세상을 다시 만들기위해 맥주를 시켰던 것 뿐이다.
그 사람은 나의 말에 황당하는 듯이 웃었다. 장난하는 거야?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황당함을 감추지 않았다. 난 다시 이야기 해야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나 그 사람 정말 사랑해"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장을 보고 같이 저녁을 해 먹고 오늘 아침에 같은 이부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하는 말을 그 사람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오전까지만 해도 난 그 사람과 같이 살아가는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그래 그 말을 한 것은 나였다. 그 사람이 아니었다. 난 이 사람 역시 사랑한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영원히 변치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의 실수였다. 사랑은 언제든지 변하는 거였고 유통기간이 있었다. 영원 같은 사랑도 이삼 년이면 끝이 나길 마련이다. 난 그 사람에게 헤어지자고 말했고 그런 나 자신을 너무 뿌듯해 했었다. 그것이 나의 쿨한 사랑의 끝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날의 어두침침한 바의 냄새와 음악이 생각이 난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깨어나면서 조차 난 그게 내 잘못이 아니길 바랐다. 헤어지자고 말한 게 나였는지 아니면 그 사람이었는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비겁한 회피일 뿐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게 나였음을 기억한다. 그리고 십수 년 동안 스스로 벌을 내리고 난 벌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며 모든 것을 내 탓을 하고 힐난했다. 어떤 사람은 떠났고 어떤 사람은 떠나보냈지만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려야 잠이 들 수 있었다.
커피를 꺼내려고 보니 찬장서랍에 있는 황태포가 생각이 났다. 황태포를 에어프라이어의 돌리면 생각보다 맛있는 안주가 된다. 그래서 황태포를 꺼내서 에어프라이어 몇분 돌렸다. 맥주대신 탄산수 하나를 꺼내 유리잔에 따랗다. 아직도 난 유리잔에 음료수를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구워진 황태포를 먹고 있자니 먹으면서 뭘 하려고 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고소한 황태포와 탄산수는 제법 잘 어울린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무슨 생각을 하려고 했더라, 무엇을 하려고 했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에어프라이어에 살짝 구워진 황태포는 고소하니 너무나 맛있었다. 단 것을 줄이기 위해 콜라 대신 먹기 시작한 탄산수지만 요즘은 제법 익숙해졌는지 어떤 때는 오히려 콜라보다 좋을 때가 있다. 음식이 주는 맛을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 시원한 청량감을 주기 때문이다.
창밖에는 어느덧 깜깜한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비가 온다고 했던가? 창밖에 빗방울이 하나둘씩 맺히고 있다. 아니, 그보다 나는 방금 전에 일어났는데 왜 벌써 밤이 된 건지 기억이 안 난다. 그런 날이 가끔 있다. 내가 유일하게 하루에서 기억나는 것들은 이불을 개고 방을 정리하고 그런 것뿐이다.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가고 퇴근을 하고 이런 것들은 하루가 끝이 나면 거의 기억나지 않는 날도 많다. 그리고 이제 잠이 들면 꿈도 꾸지 않는다. 꿈을 꾸지 않는 건지 꿈의 내용이 생각이 안나는 건지 모른다. 가끔씩 오랜 기억만이 돌아와 나의 빈 시간을 채운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허세였어, 난 진작 알았어야 했다. 지금처럼 아무나 붙잡고 사랑하기를 원하기 전에 나 스스로 빛이 날 때 알았어야 했다. 그런데 난 아직도 허세에 찬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어두운 테이블 위에 식탁 조명만 하나만 켜놓고 창밖으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의 불빛을 보면서 스스로 사그라져 가는 빛에 취해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쩔 때는 혹은 이건 전부 내가 꾸는 꿈은 아닐까 눈을 떠보면 길거리 같은 데 쓰러져 죽어 가고 있는 중에 끝나지 않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복하는 몇몇 습관들이 내가 아직 현실에 있음을 깨우쳐 주지만 밤이 되면 여전히 안갯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반복하는 습관이 나의 삶을 수면으로 끌어 올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렇지 않다.
반복하는 습관들, 복용을 멈춘 약 그리고 여전히 길어지는 상담 시간, 모든 것들은 나의 습관처럼 되돌아 오지만 나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달라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것인가. 에어프라이기로 돌려 잠깐 따뜻해진 말린 황태포처럼 쉽게 다시 딱딱하고 차가운 상태로 돌아간다.
난 그 사람과 이혼을 했다. 그 사람이 날 떠난 게 아니었다. 내가 그 사람을 떠났다. 우리는 같이 살고 결혼하고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믿었지만 마법처럼 사라져 버렸다. 난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고 믿었고 그 사람은 며칠 후 집을 떠났다. 지금에야 더러운 주문 같은 사랑들이 그 때 내 삶을 지배했었음을 깨달았다. 어느 날 그 주문들에서 알수 없는 이유로 깨어났고 이후 난 사랑을 모르게 되었다. 이제는 조금의 두근거림과, 내가 기댈 수 있는 무언가, 마음에 안정을 주는 작은 어떤 것들에 자주 허물어질 뿐이다. 주문에서 깨어났을 때에야 무엇이 사랑이었는지 알게 되었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있었다.
새벽 두 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는 꿈도 기억도 아무 일도 없이 깨어났으면 좋겠다. 오늘 나의 주문은 오직 그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