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식으로 뭘 먹을까 결정하는 데 꽤 시간이 오래 걸리는 타입의 인간이지만, 활동가로 살면서는 때때로 ‘흔들리지 않는 결정의 기준’들을 발휘하곤 합니다. 일종의 ‘녹색 생활의 기술’이라 부르고 싶은 것들인데요, 그중 하나가 ‘모르면 쓰지 말자’입니다.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 일상의 풍경들이 있습니다. 편집이 과해서 당최 스토리를 파악하기 힘든 영화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물건을 살 때 꼭 성분표를 확인하는 편인데, 화학 성분이 들어간 제품의 경우 정확히 어떤 성분인지, 인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소비하는 순간에 알 수가 없습니다. 인터넷을 뒤져서 정보가 발견되면 다행이지만, 대체로 기업은 ‘영업 비밀’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건 뭔가 불공평해!’라는 반발로 시작한 것이 ‘노푸(No Shampoo)’입니다. 제 일상을 점령하던 생활 화학 제품을 보이콧하는, 이른바 ‘노-케미(No-chemistry)족’이 되겠다 선언했지요. 욕실을 차지하고 있는 ‘비밀스러운’ 제품들부터 하나씩 떠나보내기로 했습니다. 샴푸, 린스, 컨디셔너, 바디 워셔, 폼 클렌져, 클렌징 오일… 얘네들이 지금 당장 제 몸의 때를 잘 녹이고 피부를 부드럽게 만들어 줄 수는 있겠지만, 특정한 화학성분이 몸속에 스며들어 나쁜 작용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의도한 게 아니더라도 말이죠. 저는 그런 부정적인 ‘가능성’을 과감히 차단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모르면 안 쓰면 되지!’
그렇게 4년 차에 접어든 노푸 적응기는 재미있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부끄럽고 거창하지만 ‘미니멀리즘’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생활이 가뜬해지는 경험을 합니다. 욕실에는 달랑 비누 네 개가 남았습니다.
① (비누 네 개 중 좌측 상단) 자외선 차단제를 바른 날이나 미세먼지가 심한 날 세안하는 용도의 천연 비누. 평소에는 미지근한 물로만 세안합니다. 몸은 비누를 사용하지 않고 미지근한 물과 바디 브러쉬로 마사지하듯 문지르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따로 보습제를 바르지 않는데, 이미 피부에 적당한 기름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한겨울에도 예전만큼 간지럽지 않습니다.
② (좌측 하단) 머리카락의 먼지를 제거하는 데 사용하는 천연 비누. 노푸를 시작하면 두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피지를 과다하게 분비하기도 하고 극단적으로 건조해지기도 하며 적절한 상태를 스스로 찾습니다. 사람에 따라 수 주에서 수 개월까지 걸리기도 합니다. 떡짐과 비듬으로 점철되는 이 고비를 견뎌야 물로만 감아도 반발하지 않는 두피를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로 감은 후 EM 희석액이나 레몬청, 매실청으로 헹구는 실험은 제 모발을 부드럽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③ (우측 하단) 속옷이나 손수건을 손빨래할 때 사용하는 EM 세탁비누.
④ (우측 상단) 걸레를 손빨래할 때 사용하는 빨랫비누.
⑤ (사진 좌측상단) 출장, 여행, 운동할 때 사용하는 휴대용 비누 조각.
노푸를 계기로 다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포장도 없는 비누를 사용하니 욕실에서 발생하는 플라스틱 용기 쓰레기가 크게 줄었습니다. 부수적 효과인 셈입니다. 세탁할 때 섬유유연제는 사용하지 않고요, 속옷은 웬만하면 오가닉 면을 찾습니다. 화장도 잘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강박적으로 집착하던 물광 피부, 찰랑거리고 향기로운 머릿결, 안티 에이징, 화이트닝 같은 수식에 신기하리만큼 무심해졌습니다. 화학 제품을 멀리하게 되면서 과도한 위생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고, ‘향’이 꼭 필요할까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깔끔하고 위생적인’의 기준은 어디에서 왔으며,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생활 화학 제품으로 때를 벗기고 향을 입히고 있는 걸까요. 그런 의문들은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제 자신을 인지하도록 이끌었고, 제 몸, 민낯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의 전환을 일으켰습니다.
아직도 시행착오를 겪으며 불편한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의 가뜬한 생활이 마음에 들기에 지속해 볼 생각입니다. 소비할 때 1초도 고민할 필요 없는 녹색 생활의 기술, ‘뭔지 모르면 쓰지 말자’ 전략은 다른 다양한 상황에도 적용이 가능합니다. 언젠가 소개할 자리가 생기면 또 찾아뵙겠습니다.
*녹색희망 265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2018. 1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