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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Oct 18. 2024

받아들이기

만약 나에게 정은이와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나는 어떨까?


수술로 제거하지 못하는 종양이 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커질지는 모르지만 커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내일 갑자기 커질 수도 있고, 아주 조금씩 20년에 걸쳐 커질 수도 있다. 종양이 커져가면서 말이 조금씩 어눌해지거나 인지능력이 조금씩 떨어질 수 있다. 그런 징조가 보이면 목숨을 건 수술을 해야 한다.


상상을 통해 정은이의 상황에 들어가봤다. 100% 공감하고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공감하고 느끼려 노력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 문득 '받아들이기'가 떠올랐다.


지독한 상실감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 감정을 솔직하게 대면하고 알아차리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찐이의 장애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그랬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나 정말 착하게 살았는데 도대체 왜!'같은 불만 섞인 절규와 '뭐가 잘못된 걸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걸까?' 따위의 절규 섞인 질문이 분노, 짜증, 슬픔, 연민, 무력감, 특히 두려움과 같은 감정과 마구마구 뒤섞여 내 안에서 피어올랐다.



감정들을 솔직하게 대면하는 연습을 하면 할 수록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과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찐이의 장애나 사람들의 시선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내 감정과 태도, 삶을 대하는 방식,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 따위의 것들은 내가 통제할 수 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 수용하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키는데 집중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필요한 건 다른 세상이었다.


나를 변화시키는 일을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 안에서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때 내가 의지했던 건 책이었다. 책에는 새로운 감정, 관점, 세계, 지식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것들부터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고, 술을 마시는 시간을 줄이고, 매일 아주 10분이라도 책을 읽으려 하고, 일기를 쓰고, 아이의 하루를 궁금해하고, 아내의 슬픔과 힘듦을 이해하려 했다.


엄마, 아빠, 정은이의 지지가 없었다면 '받아들임'은 없었을 거라 단언할 수 있다. 그들은 나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었다. 내가 심리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항상 뒤에서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었고, 내가 너무 힘들 때면 연민을 담아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난 그 품에서 잠시 쉬며 다시 에너지를 얻어 살아나갈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6년 만에 난 아이의 장애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100% 수용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며 내 마음을 챙기며 하루를 살아갈 수는 있게 되었다. 내 상황에 맞는 나만의 리듬을 찾을 수 있었다.


정은이에게도 이런 받아들임의 과정이 필요하겠지. 시작했을까? 아직일까? 벌써 대부분 받아들인걸까?


언젠가 찐이에게 고모가 잉잉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에게 물어보니 갑자기 대성통곡을 했다고 하더라. 어마어마한 상실감 앞에서 목 놓아 울 수 있어야 남아 있는 생을 비틀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충분히 슬퍼하고 표현한 뒤에야 내 감정을 차분히 솔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그것이 받아들이기의 시작이다.


정은이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까지


뒤에서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연민을 담아 포근하게 안아줄 준비를 하고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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